이젠 수소문이 필요한 꽃, 뒤지고 뒤져 찾았습니다

신극채 2026. 5. 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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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자운영... 논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던 봄의 신호, 오래오래 남아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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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채 기자]

▲ 다라미자운영마을 앞 논에 핀 자운영꽃 마을 앞 논에 가득 자운영이 자라고 있다. 비료가 풍부하지 않았던 예전엔 남부지방에서 녹비식물로 흔히 심어졌다. 지금은 화학 비료, 기계 영농, 월동 피해, 씨앗 수급 등의 문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다. 보기 어렵게 되자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 신극채
'자운영'을 보면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떠올릴까. 논을 가득 채운 보랏빛 꽃물결 앞에서든, 가득은 아니더라도 논둑이나 들녘에 듬성듬성 핀 몇 송이 앞에서든 꽃은 누군가의 오래된 시간을 되살리곤 한다.

이제 자운영은 예전처럼 흔히 만날 수 있는 꽃이 아니다. 한동안 논에 심어 녹비식물(비료로 사용하는 작물)로 활용하던 농사의 일부였지만, 농사 방식이 바뀌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일부러 찾아가야 만나는 풍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가슴 속 어딘가 간직된 저마다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자운영을 찾는다.

자운영을 찾아서

그런 자운영을 찾아 나섰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전화하면, 자운영 축제까지 열었던 동네조차도 그만둔 지 오래라거나 지금은 마을 주변에서도 볼 수 없다고 했다. 뒤지고 뒤져 지난 4월 15일, 충남 아산에 있는 '다라미자운영마을'을 찾았다. 마을에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분이 올해도 논에 심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차를 몰았다. 첫 방문 때는 시기가 일러 초록 잎만 무성했고 꽃봉오리는 입을 다문 채였다.

지난 4월 24일 다시 찾아갔을 때는 사진 속의 흐드러진 풍경은 아니었다. 꽃은 성글게 피어 있었고 시들어가는 꽃도 적지 않았다. 자운영 사이로 거친 뚝새풀이 더 왕성하게 논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꽃 잔치를 바라던 기대는 식었을지 몰라도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성근 꽃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 앞에서 나는 한동안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 자운영 1,2. 큰줄흰나비와 꿀벌이 찾아와 꽃 사이를 오가며 꿀을 탐색한다. 3. 씨앗을 따로 뿌리지 않았어도 지난해 자연적으로 여문 씨앗에서 싹이 돋아 꽃까지 피웠다. 4. 서둘러 핀 꽃은 벌써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 신극채
쟁기를 끌며 자운영꽃이 붉게 핀 논을 갈아엎는 어미 소와 그 뒤를 겅중겅중 따라다니던 송아지가 떠올랐다. 쟁기에 갈려 길게 뒤집힌 흙덩어리와 그 아래에 깔린 자운영이 가물거렸다. 어쩐 일인지 그 기억은 또렷하지 않았다.

내가 실제로 보거나 겪은 장면인지 아니면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와 상상이 섞여 만들어진 풍경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래전에 읽었던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묘사되었던 장면이 기억 속 어딘가 묻혀있다가 흔들리는 자운영을 따라 되살아났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자운영꽃이 잊혔던 기억을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자운영을 찾아 나선 계기는 글쓰기 플랫폼에서 만난 글벗의 부탁이었다. 식물 관련 글을 쓰는 내게 함께 찾아보자고 했다. 그는 '자운영꽃 오보록하게 필 무렵'이라는 글에서, 지금은 숨어버렸지만 봄이면 논들을 자줏빛으로 물들이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흐릿한 내 기억과는 달리 그의 기억은 구체적이고 향기로웠다.

"자운영이 피면 논일이 바빠졌어"

며칠 전에는 백양더부살이를 찾아 내장산 입구의 저수지를 찾았다가 뜻밖의 자운영을 만났다. 저수지 둑 아래 논에는 유채꽃이 드문드문 피었고 논둑 한쪽에 붉은 기운이 보여 급히 다가갔다. 자운영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노인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는 이 논에 자운영이 가득했지. 자운영꽃이 피면 이제 논일이 바빠졌어. 그때는 전부 손으로 일할 때였어."

짧은 말을 마친 그는 논이 이어진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는 유채꽃이 핀 논을 바라보며, 요즘엔 관광용으로 많이 심는데 올해는 날씨 탓인지 씨앗이 부실해선지 싹이 많이 나지 않아 꽃이 시원치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봄이면 이렇게라도 피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덧붙였다. 주름지고 그을린 그의 손을 잠시 잡았다. 돌아서면서 내년 봄에도 이곳에 유채든 자운영이든 피기를 바랐다.
▲ 내장산 근처 저수지 앞 논둑에 핀 자운영 논둑에 드물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일부러 씨앗을 뿌리지 않았어도 스스로 나고 자라고 있다. 오래도록 이어져 늙은 농부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 신극채
앞서 다라미자운영마을로 안내해 준 이는 기억이 아닌 지금의 이야기를 했다. 이 마을은 친환경 쌀을 생산하기 위해 해마다 자운영을 심어 왔다고 했다. 가끔 마을 이름을 보고 나처럼 자운영의 존재를 물어오면 자세히 설명한단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님 생각도 나고 자운영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그리움을 되살려 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며 웃음 지었다. 갈수록 자운영을 심는 논이 줄어드는 데다 그마저도 기후변화와 냉해로 잘 자라지 못한다며 한편 아쉬워도 했다.

꽃차 소믈리에이기도 한 그녀는 자운영의 또 다른 매력을 일러주었다. 이른 봄에는 새순을 데쳐 나물로 무치면 풋풋한 풀향에 달짝지근하다는 맛난 이야기를 했고, 모양과 향이 으뜸인 으름덩굴꽃차처럼 고운 자운영꽃차도 언젠가는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내년 봄에도 자운영이 다시 피어났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논을 가득 물들이던 보랏빛 물결이 아니어도 좋다. 논둑 한쪽에 몇 송이만이라도 발그레 하게 피어 누군가의 잊혀가는 기억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 몸을 땅속에 묻어 흙을 살리듯 자운영이 우리의 마음도 북돋우며 오래도록 곁에 남아주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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