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선고까지 78년... 미군정 포고2호 낙인 지우기, 이제 시작

심규상 2026. 5. 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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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 충남 서천의 한 장터에서 수첩을 들고 현장을 누비던 기자의 '펜 끝'은 서슬 퍼런 미군정의 법망을 피하지 못했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정우철 판사)은 지난 4월 24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 위반 등의 혐의로 과거 유죄 판결을 받았던 백낙용과 백낙정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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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포고령 2호 무죄 판결의 의미] 현대사 뒤틀린 매듭 푸는 첫 단추

[심규상 대전충청 기자]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백낙용의 판결문(1948년 2월 17일자 판결문)
ⓒ 박만순
78년 전, 충남 서천의 한 장터에서 수첩을 들고 현장을 누비던 기자의 '펜 끝'은 서슬 퍼런 미군정의 법망을 피하지 못했다. 좌익 계열 단체의 집회를 취재해 보도했다는 이유로 '범죄자'의 낙인이 찍혔던 백낙용 선생(1911년생)과 집회에 참석한 백낙정(1919년생)은 죽어서야 비로소 그 무거운 굴레를 벗었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정우철 판사)은 지난 4월 24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 위반 등의 혐의로 과거 유죄 판결을 받았던 백낙용과 백낙정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48년 첫 판결 이후 무려 78년 만이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과거 처벌의 근거가 됐던 '포고 제2호'의 위헌성이다.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는 1945년 9월 7일 포고 제1호로 38도선 이남의 조선 지역에 군정을 실시함을 선언하고, 같은 날 포고 제2호(범죄 또는 법규위반)를 발령했다. 포고 제2호는 항복문서 조항이나 점령군의 명령 위반자, 공중치안 교란자 등을 점령군 군율회의에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백낙용은 1947년경 서천군 지역에서 좌익 계열 단체의 집회를 취재해 동아일보에 보도했다는 등의 이유로 기소됐다. 백낙정은 비슷한 시기 좌익 계열 단체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미군정은 이를 '공공질서 교란'이나 '연합군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했다.

법원 "포고령 2호,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추상적"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는 1945년 9월 8일, 더글라스맥아더가 포고한 포고 제2호
ⓒ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판결문 발췌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명확했다. 포고령 제2호가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추상적이어서 통상의 판단능력을 가진 국민이 금지 행위가 무엇인지 예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한 "형벌의 종류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죄형법정주의를 명백히 위반했다"며 "대한민국 헌법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위헌·무효인 법령이다"라고 판시했다. 존재해서는 안 될 법으로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았던 과거의 과오를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포고령 위반 외에도 백낙용과 백낙정에게 씌워졌던 법령 제19호 위반, 집회행렬취체규칙 위반,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 역시 모두 무죄로 결론 났다. 그를 죄인으로 몰았던 당시의 수사 기록이나 재판 기록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관련 기록이 모두 소실됐고, 범죄 사실을 입증할 새로운 증거도 제출되지 않았다"며 무죄 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이번 재심은 백낙용의 아들 백남식씨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이뤄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들은 포기하지 않고 법정 문을 두드렸고, 결국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닌 '기자'였음을 증명해 냈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정우철 판사)은 지난 4월 24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 위반 등의 혐의로 과거 유죄 판결을 받았던 백낙용 선생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48년 첫 판결 이후 무려 78년 만의 일이다.
ⓒ 대전지법 홍성지원 판결문 발췌
이번 판결은 단순히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우리 현대사의 뒤틀린 매듭을 푸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미군정 포고령 제2호는 해방 정국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극도로 왜곡했다. 단순 조사만 받은 경우부터 수년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경우까지 허다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들이 정부 수립 이후에도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됐고, 전쟁 중 예비검속과 불법적 학살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사건을 대리한 이명춘 법무법인 정도 변호사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포고령 제2호 위반 판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역사적 혼란기 속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던 사람들의 굴레를 하나하나 풀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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