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죽게 해달라'는 할머니의 기도를 멈추게 한 손녀

이현아 2026. 5. 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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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생 임봉근·91년생 임다운의 <오늘내일하는 사이>를 읽고

[이현아 기자]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

흔치 않은 선택이지만, 이 가족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순간의 결정은 한 가족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1931년생 임봉근과 1991년생 손녀 임다운은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통해 서로의 삶을 이어왔다.
 <오늘내일하는 사이> 책표지
ⓒ 안온북스
<오늘내일하는 사이>(2026년 4월 출간)는 할머니의 편지와 손녀의 이야기를 엮은 산문집이다. 코로나19로 고립이 일상이 되었던 시기, 홀로 지내던 임봉근 할머니는 '자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만큼 외로움에 잠겨 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손녀 임다운은 하루에 한 편씩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시작된 기록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임봉근 할머니는 흔히 손주 걱정부터 하는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아포가토가 주는 달콤씁쓸한 맛을 좋아하고, 인공지능 스피커로 트로트도 틀 줄 아는 신세대적 면모가 있다. 이 다양한 모습에도 그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느 할머니들이 가진 손주를 향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손녀의 바람과는 달리, 할머니의 편지는 바로 전해지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의 집에는 사랑이 담긴 편지들이 켜켜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외로움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썼던 글들은 손녀를 위한 연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다정한 편지는 오로지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있을 때 잘해. 허무한 게 인생이란 걸 알아야 해. 빈손으로 가니까.'

편지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관계'의 중요성을 조명하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이며, 이는 순탄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을 때 돌봐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평생을 함께할 듯 타오르다가도 사소한 이유로 멀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잠깐 스친 인연과 미지근하게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다. 임봉근 할머니가 모든 관계에 초연해 보이는 이유는 물김치를 준 이웃에겐 글을 가르쳐주고, 안부를 물어봐 준 경비 아저씨에겐 우유를 건네는 일로 설명된다. 스쳐 지나갈 법한 인연에 진심을 다한 것이야말로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남편이 가족들의 돈을 훔쳐 집을 떠난 뒤, 임봉근 할머니는 자녀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흔히 '계집애라면 소학교도 안 보내던 시절'에 그는 좌절 대신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했다.

임봉근 할머니의 선택은 이름이 가진 의미와도 맞닿아있다. 받들 봉(奉)에 뿌리 근(根). 다음 자식에게 막대기나 뿌리 같은 것이 달려 나오라는 의미였지만, 동생은 태어나지 않았다. 대신 자식들의 성을 바꿈으로써 자신이 대를 이었다. 시조를 자처한 임봉근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름값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름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해 낸 것이다.

손녀 임다운 역시 그의 성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할머니의 적극성까지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편지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임봉근 할머니가 치부로 여겼던 과거를 부끄러움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 바꿔낸 셈이다.

'멋있게 살 나이는 이제부터야.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탓하지 말고 모든 내 탓으로. 너그러이 재미나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인 것 같더라.'

책은 노년을 단순히 쇠퇴의 시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재정리하고,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으로 그린다. 특히 노년에서의 이별은 오늘이나 내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이기도 하다.

손녀 임다운의 세계에선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하지만, 임봉근 할머니에게 몸이 멀어지는 것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기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은 나이가 들어서 갑자기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서 조금씩 연습해야 할 태도임을 강조한다.

임봉근 할머니는 손녀 임다운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한다. 그 고백을 멈추지 않기 위해 아프면 바로 병원을 찾고, 복지관에서 수업을 들으며, 스쳐 지나갈 인연을 '길동무'라 이름 짓고 안부를 묻는다. 지키고 싶은 관계가 있다면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준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재, 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노년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혼자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역시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 두려움을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삶이 때로는 진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붙잡을 수 있는 관계가 있다고 얘기할 뿐이다.

'삶이 진창일 때도 잠깐의 천국을 찾아가며 90년을 살아온 할머니를 보면, 나이 든다는 것이 꼭 무언가 쇠하고 닳아 없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덜 두려워진다.'

손녀는 외로움이라는 진창 속에 할머니를 남겨두지 않았다. 임봉근 할머니에게 노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손녀와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힘이 닿는 데까지 훨훨 살아내야 할 '현재'로 바뀌었다.

우리는 때때로 관계에 익숙해져 할 말을 미루거나, 존재의 소중함을 망각한다. 바쁘다는 핑계는 쉽게 꺼내지만, 진심을 전하는 일에는 시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있을 때 잘하라'는 말에 동감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또 같은 실수를 범한다. 관계가 주는 익숙함은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손녀 임다운은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통화로 간간이 안부를 물었다. 그는 할머니가 없는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현재에서 추억할 수 있는 순간들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들 사이의 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끈끈함이 있다. 서로를 붙잡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내일하는 사이>라는 책 역시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실한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년의 시간을 견디는 힘은 결국 지금의 관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어쩌면 혼자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 늙는 것이 두려운 시대, <오늘내일하는 사이>는 삶이 진창 같다고 느껴질 때 '잠깐의 천국'을 찾으라고 일러주는 현대의 안내서로 남을 것이다.

'난 네가 보물이야. 내가 죽는 날까지 내 가슴에 안고 숨 쉬고 사는 꽃 보물이야.
하느님 꽃 보물 주시매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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