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헝가리, 푸틴-김정은 [손기웅의 가야만 하는 길]

37년 전 5월 2일 새벽,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철책에 헝가리 군인들이 다가섰다. 순찰·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중화기 무장이 아니었다. 커다란 절단기가 손에 들렸다. 군인들이 국경 철조망 울타리와 탈출 방지 전기 보안시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냉전의 상징,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서방 단절을 상징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에 첫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1989년 대격변의 신호탄으로 헝가리가 서방과의 폐쇄를 해제한 최초의 동방 국가로 나섰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 어려웠던 경제적 요구가 큰 배경이었다. 국경방어시설 관리 자체가 큰 부담이었을 정도였다.
그 날 저녁, 사실을 접한 당시 서독 수상청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동독 주민이 이를 알게 되면 즉시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이야기와 기대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동독에서 체코슬로바키아(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를 거쳐 헝가리로 가서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대탈주, 엑소더스(Exodus)의 기나긴 행렬이 시작되었다. 역사가 바뀌는, 역사를 새로 쓰는 급류였다.
동베를린, 공산당 정치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동구 사회주의권 군사동맹조약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 소련·동독·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 가담)’의 맹방이었던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간 국경 약 360㎞에 물꼬를 트자 전면적 붕괴의 징조임을 직감했다. 사회주의 형제국을 배신한 헝가리에 대한 맹비난이 하늘을 찔렀다.
당 지도부는 즉시 ‘대형(大兄)’ 소련에 SOS를 날렸다. 모스크바의 지원을 바라며 WTO 소집을 요청했다. 당연히 헝가리에 국경 개방 취소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은 뒤집어졌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그러한 만남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1985년 당 서기장으로 권력 정상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고’를 펼쳤다. 이는 국내는 물론이고 대외 관계도 포함됐다.
가장 상징적 변화가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을 포기한 것이다. 전임 당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1968년 초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개혁을 8월 소련이 무력 침공하면서 좌절시켰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며 내세웠던 원칙이다. 이는 사회주의국가의 주권은 그 나라의 발전 방향이 다른 사회주의국가 및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장된다는 ‘제한 주권론’ 주장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세운 새로운 원칙은 WTO 회원국들이 각자의 국내 정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WTO 국가는 물론이고 모든 국가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1980년대 후반 확연히 드러난 소련 체제의 구조적 결함, 심각해지는 경제 문제, 전 세계적 반공(反共) 정서, 1979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장기화 및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한 경제적·정치적 부담, 주민들의 변화 요구 등으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고 갈 길이 바쁜 소련이 동부 유럽이나 다른 지역 사회주의국가들에 소련의 의지를 강요한다는 것이 점점 더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한 고르바초프의 결단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새 정책에 농담조로 붙여진 이름이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 Doctrine)’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 세계적 인기를 얻은 노래 ‘마이웨이(My Way·나의 길)’, 가사 중 특히 “I did it my way(나는 나의 길을 걸었다/내 방식대로 살았다)” 구절에 비유한 것이다.
동독의 간절함에도, WTO의 다수 회원국이 더 이상 개별 회원국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고르바초프의 입장은 확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소련 및 사회주의권 건설,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하던 상황에서 동독 지도부는 고르바초프를 너무 몰랐다,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헝가리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신정책에 발 맞춰 1988년 11월 23일 놀랍게도 경제학자 미클로스 네메스를 총리로 선출했다. 네메스는 취임 직후부터 서방과의 국경 개방을 고려했으며 이미 1989년 3월 5일 국경개방계획을 고르바초프에게 알리고 승인받았다.
고르바초프에서 헝가리로, 마침내 결단의 문고리가 동독 주민 손에 쥐어졌다. 열 것인가 말 것인가. 동독 주민은 자유·민주주의·인권·복지, 인간다운 삶을 향한 문을 열어 젖혔다.
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경유 대규모 탈출의 결정타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지역 쇼프론(Sopron)에서 1989년 8월 19일 열린 ‘범유럽소풍(Pan-European Picnic)’ 행사였다(지난해 8월 8일자 칼럼 “36년, 64년 그리고 80년 전, 뜨거웠던 8월들” 참조).
1989년 5월 2일 당시 소련의 악명 높았던 보안기관 KGB(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가보안위원회)의 동독 드레스덴 책임자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고르바초프의 정책, 헝가리와 동독의 변화, 동독 주민의 선택을 누구보다 깊이 지켜보았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눈을 감기 몇 달 전, 그를 비웃듯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에서 더 나가 “한 국가의 주권은 그 나라의 발전 방향이 러시아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장된다”는 ‘일방적 조건 주권론’이라 할 수 있다. 인접국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도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전쟁에 힘이 부치자, 변화를 거부하는 최악의 독재자 김정은과 손을 잡았다. 경제난에 외교적 고립으로 외통수에 몰렸던 김정은의 숨통을 터주었다. 아예 혈맹의 유대를 다졌다.
세계를 변화시켰던, 국민에게 자유를 주었던 고르바초프는 그 국민으로부터 최악의 지도자란 비난 속에 사라졌다. 푸틴은 그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에 권력을 구가하고 있다. 김정은은 그 이상이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에 “나쁜 놈일수록 잘 산다”가 더해지는 참담한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국내 정국도 겹쳐지는 5월이다.

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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