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은의 트렌드 터치] 언런, 실패를 운용하라

2026. 5. 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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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칼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AI를 활용하고, 데이터는 넘쳐나고, 조직은 더 스마트해진다. 그런데 성과는 기대만큼 치고 나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틀린 답을 누구보다 빨리 맞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틀린 것을 버리는 데는 그다지 저항이 없다. 문제는 한 번이라도 맞았던 것을 버려야 할 때다. 우리가 과거의 방식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그 방식이 우리를 한 번이라도 성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상심리, 확증편향, 매몰비용 등 이를 뒷받침할 심리학적 근거는 많다. 보상은 기억을 강화하고, 강화된 기억은 선택을 고정시킨다. 그래서 변화는 늘 같은 지점에서 막힌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 과거 성공에 매이면 조직 느려져
축적된 경험자산 과감히 버리고
실패를 실험 결과로 자산화해야

김지윤 기자

일론 머스크가 로켓을 반복적으로 실패시키던 장면은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무모함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를 줄여야만 한다는 항공우주 산업의 오랜 전제를 버린 선택이었다. 때로 변화는 더 나은 해법을 찾는 데서가 아니라, 기존의 전제를 폐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감각은 지금 많은 조직이 마주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전략은 틀리지 않았는데 성과가 둔화되고, 실행은 더 정교해졌는데 시장의 반응은 오히려 둔감해진다. 더 많은 데이터를 쌓고, 더 많은 검증을 거치고,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럴수록 조직은 가벼워지기보다 무거워진다. 잘하려는 노력 자체가 속도를 늦추는 역설이다.

한 번의 성공 공식을 조직 전반으로 확장해온 경우일수록, 그것을 의심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효과를 증명해낸 방식일수록, 폐기하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말 더 배우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이 지점에서 ‘언런(unlearn)’이라는 단어가 힘을 갖는다. 새로 배우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능력.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식과 공식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 여기서 핵심은 틀린 것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한때는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하지 않게 된 ‘성공의 방식’을 내려놓는 일이다.

성공체험은 조직을 가장 강하게 묶는다. 실패는 경계하게 만들지만 성공은 반복하게 만든다. 문제는 지금처럼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을 때다. 같은 방식이 더 이상 같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 공식을 쉽게 폐기하지 못한다. 경험은 자산이지만, 그 축적이 클수록 전환은 더 늦어진다. 익숙함은 효율을 만들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닫기도 한다.

이 변화는 실패의 의미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과거의 실패는 줄여야 할 리스크였고 관리의 대상이었다. 실패를 최소화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실패는 점점 다른 성격을 띤다. 실패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입력값이 된다. 무엇이 틀렸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확인했는지가 남는다. 빠르게 움직이는 조직들은 이미 이 전환을 실천하고 있다. 실패를 ‘경험’으로 회고하기보다 ‘실험 결과’로 기록한다. 의사결정은 가설과 검증의 구조를 띠고, 실행은 한 번의 완성보다 반복 가능한 단위로 쪼개진다. 중요한 것은 반복의 속도를 높이는 일이다. 실패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쟁의 기준이 바뀐다. 더 적게 실패하는 조직이 아니라, 실패를 더 잘 다루는 조직이 앞서기 시작한다. 그래서 질문도 달라진다. 우리는 실패를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가가 아니라, 실패를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 실패를 자산화하는 조직은 몇 가지 공통된 태도를 보인다. 실패를 감정이 아니라 로그로 남기고, 의사결정에 재사용 가능한 형태로 구조화한다. 한 번의 완벽한 실행보다 여러 번의 빠른 시도를 설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정답을 고정하지 않는 것이 곧 전략이 된다.

조직이 느려지는 순간은 더 이상 배우지 않을 때가 아니라 버리지 못할 때다. 이미 작동하지 않는 방식을 붙잡고 있는 한, 새로운 전략은 실행되지 않는다. 축적의 시대에서 우리는 비움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배우는 속도보다 버리는 타이밍이 성과를 가른다. 언런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 되고 있다. 실패는 설계하고 다뤄야 할 자원이다. 실패를 관리할 것인가, 실패를 운용할 것인가.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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