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매화보다 더 기억에 남을 사진을 건졌다
이재필 2026. 5. 3. 18:58
Contax RTS와 함께 떠난 영혼의 안식처, 안동 봉정사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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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7촬영 포르쉐디자인그룹이 터치한 콘탁스의 디자인 |
| ⓒ 이재필 |
뉴스의 문장들은 언제나 건조하게 계절을 전한다. 4월 초부터 들려온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도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보였을 것이다. 남들 다하는 꽃놀이에 흥미없던 나였지만 차일 피일 미루다 4월 중순이 넘어서야 어디가 좋을지 찾아보다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먼저 피어나는 꽃의 시간은, 언제부턴가 나를 조용히 흔들어 놓고 설레게 만든다. 그렇게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선명했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빛나는 안동 봉정사. 그곳은 나에게 사찰이라기보다 하나의 '상태'에 가까웠다.
'상태'라는 단어가 낯설게 전달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 사이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찾던 그곳을 이번에 처음으로 '꽃'을 이유로 찾았다.
공간 전체를 읽어내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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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매화사이로 보이는 만세루의 풍경 |
| ⓒ 이재필 |
오늘의 선택은 Contax(콘탁스) RTS였다. 1970년대 독일의 광학적 자존심과 일본의 전자 기술이 만나 탄생한 이 기계는, 같은 세대의 다른 브랜드에 중급기(프로 혹은 하이아마추어를 위한 카메라) 정도의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콘탁스의 첫 플래그십(브랜드의 모든 기술을 보여주는 상급기)이다. 누군가는 '그돈씨'(그 돈이면 다른 모델 사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 중간의 어정쩡한 형태의 디자인 때문에 더 기억된다.
손에 쥐었을 때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그 느낌은 휴대성을 방해하기보다 그립을 쥐었을 때 기분 좋은 균형감을 전달해준다. 무거운 기계를 들고 있다는 감각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작업 도구를 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렌즈는 탐론 24mm를 택했다. 24mm 렌즈의 적당한 왜곡(실제보다 과장된 투시)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오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찰의 웅장함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날의 나는 봉정사의 만세루과 대웅전 그리고 영산암까지 이어지는 사찰의 구조가 아니라, 그 공간 전체를 읽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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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계단의 시작점에서 바라보면 만세루의 처마는 멀리 떨어진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
| ⓒ 이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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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공민왕의 글씨 '진여문'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글씨의 비밀 |
| ⓒ 이재필 |
빛을 읽는 방식, 리얼 타임의 가치
이 카메라를 들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의외로 '친절함'이었다. '수동 카메라'라는 딱딱한 이름 뒤에 숨겨진 다정함이랄까. 파인더를 들여다보면 내가 조리개를 조절할 때마다 상단의 마크가 녹색으로 조용히 반응한다. 측광 버튼을 누르면 시야 한쪽에 붉은 LED로 숫자 옆에 표기된다. 어둠 속에서 신호처럼 깜박이는 그 불빛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곳과 나 사이 빛의 양을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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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phone15촬영 ContaxRTS 파인더 상단의 정보표시는 조리개를 변형할 때마다 녹색의 표시가 이동하고 우측 셔터 속도는 측광버튼을 누르면 붉은색 전구가 측정된 구간에 표시되는 형태로 정보를 표기해준다. |
| ⓒ 이재필 |
RTS라는 이름에 담긴 'Real Time System(리얼 타임 시스템)'은 기술적으로 보면 셔터 반응의 지연을 없애겠다는 콘탁스의 의지다. 하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는 없다. 셔터 장전부터 측광, 릴리즈까지 모든 동작이 손의 위치를 바꿀 필요 없이 오른손 안에서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촬영이 '동작의 흐름'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이 되는 순간, 나는 봉정사의 빛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빛 속에 온전히 서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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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부산스럽게 대웅전 마당을 가로지는 보살님의 발걸음이 다가오는 부처님 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느낄수 있다. |
| ⓒ 이재필 |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 RTS의 포커싱 스크린 안에서 낯선 감각을 마주했다. 익숙한 수직 혹은 수평의 기준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분할된 초점 방식. 처음에는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수평과 수직으로 세상을 정렬해오던 시선이 갑자기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셔터를 지나고 나니, 그 대각선은 오히려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완벽하게 맞춰진 선이 아니라, 약간의 긴장을 남겨두는 선. 그 미묘한 어긋남이 이미지에 설명되지 않는 여백을 남겼다. 나는 그날, 정확하게 맞는 초점보다 조금 어긋난 시선이 때로는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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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만세루를 지나 불교로 들어서는 공간의 이동이 느껴진다. |
| ⓒ 이재필 |
셔터가 필요 없는 순간
영산암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셔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찍었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평온함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사진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잠시 멈추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나로 돌아오기 위해. Contax RTS는 리얼 타임 시스템이라는 의미처럼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 기계였다. 오히려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생각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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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TAX RTS 촬영 영산암은 모든계절에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 ⓒ 이재필 |
매화는 조용히 피어 있었고, 빛은 그 위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지 않은 채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 내 손에 남은 것은 인화될 필름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이 되는 짧은 휴식의 문장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https://brunch.co.kr/brunchbook/mycamera4t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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