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스물아홉 고선경의 『러브 온 더 락』

최혜리 2026. 5. 3. 15: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선경은 전업 시인이다. "저는 시쓰기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내 이야기를 내 방식으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쓰기는 직업이나 취미 이런게 아니고 삶의 방식에도 가까운 것 같다고 느껴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 지난달 17일 출간된 고선경(29) 시인의 새 시집 『러브 온 더 락』(창비)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55편의 시는 ‘시인의 말’처럼 바글거리는 사랑의 향연.

20대의 막무가내 사랑예찬은 아니다. 시인은 “나는 너에게 자두에 가까운지 딸기에 가까운지”(‘고백’) 상상하며 사랑의 단맛을 보다가도, 그 이면에 놓인 “씁쓸한 오렌지 향기”(‘러브 온 더 락’)를 잊지 않는다.

고선경 시집 『러브 온 더 락』 의 표지. 사진 창비

최근 서울 서교동 창비 출판사에서 만난 시인은 『러브 온 더 락』을 두고 “내 사랑의 기원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시집은 “내 손에 눈물 묻히면 죽을 줄 알아” 말하며 “마음이 난폭해지”(‘GOTCHA’)는 욕망까지 사랑인 걸 알아버린 현재에서 “도넛의 구멍 같은 첫 키스”(‘싱싱한 바닐라 한 송이와 알레르기’)의 낭만적인 과거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2022년 일간지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2023),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2025)을 시 부문 베스트셀러에 연이어 올리며 문단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지난달 기준 첫 번째 시집 5만부, 두 번째 시집 10쇄라는 보기드문 기록을 세웠다. 발행 예정인 단행본만 10여권이다.

고선경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의 표지. 사진 문학동네

쉬운 문법, 가벼운 농담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시인 특유의 서술이 독자를 사로잡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그의 첫 번째 시집 해설에서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농담을 던지고 깔깔 웃는 방식으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 하려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예컨대 고선경은 빚 갚으려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의 불안정한 현실을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

“전전하던 이 집 저 집 통째로 데리고서/스위스에 가고 싶다/빙하가 흐르는 알프스산맥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죽기 전에 못 가보면 어쩌지?/괜찮아, 너만 못 가는 거 아니야//어 그래, 좀/위로가 되네”(‘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오감을 활용해 시를 쓰는 그에게 이번 시집의 사랑은 어떤 맛이냐고 물었다. "마냥 단 맛은 아니고요. 쓴맛도 들어있고, 탄산감도 있는 맛이요. 위스키, 하이볼 같은 술이 기분을 띄우기도 하지만 방심하면 금방 취하는 것처럼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가 실제로 보고 듣고 겪은 것들로부터 시를 쓰게 돼요. 정확하게는 현실을 통과할 때 생기는 균열이나 흔들림을 시로 포착하고 싶은 것 같아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랑이라는 현실의 균열을 살핀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욕망, 그 속에 녹아있는 폭력성을 시로 바라본다. “우리가 거울처럼 서로에게 가해하던 시절/일그러진 얼굴을 사랑스러워하면서 철철 흘려보냈어”(‘누덕누덕’)

“연인 사이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폭력적인 말들로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깨물어주고 싶어’, ‘다 부숴버리고 싶어’ 같은. 그런 게 사랑의 기괴함인 건데… ‘기괴함이 없으면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지?’ ‘이것까지도 사랑인가?’ 같은 제 안의 고민을 시로 썼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물리적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도 담았다. “집에서 경찰을 불렀다 남자 친구가 나를 위협했어요 라이터로요 코앞에서 불을 켜면서 너 같은 건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버릴 수 있다고 했어요…//왜 그랬니?/너야말로 왜 그랬니? 내가 너를 위협하다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러겠니?//그때가 유일하게 남자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남자 친구가 정신과 약 먹는 여자를 싫어해요’)

젊은 시인이라는 이유로 '문단의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그다. "시인이 이미지나 수식어로 소비되는 현상은 흥미롭고, 반가운 부분도 있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시인은 결국 문장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제껏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는 청년의 감각을 내세워 온 그다. “많은 것이 너무 빠르게 무너지고 너무 쉽게 대체되는 것 같아요. 관계도, 일자리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그의 말처럼 “무엇 하나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연애는 사치이자, 관리해야 할 시스템처럼 여겨진다. 연애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여럿이 모여 소개팅을 하는 ‘로테이션 소개팅’과 가치관이 맞는 상대를 매칭해주는 ‘소개팅 앱’이 인기를 끄는 이유일 테다.

그럼에도 시인은 “필연적으로 수고스러운 게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얘기한다. “굳이 손해를 감수하며 만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선택하고,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것. 우린 그걸 보며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사회에서 그게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요.”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