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스물아홉 고선경의 『러브 온 더 락』

"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 지난달 17일 출간된 고선경(29) 시인의 새 시집 『러브 온 더 락』(창비)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55편의 시는 ‘시인의 말’처럼 바글거리는 사랑의 향연.
20대의 막무가내 사랑예찬은 아니다. 시인은 “나는 너에게 자두에 가까운지 딸기에 가까운지”(‘고백’) 상상하며 사랑의 단맛을 보다가도, 그 이면에 놓인 “씁쓸한 오렌지 향기”(‘러브 온 더 락’)를 잊지 않는다.

최근 서울 서교동 창비 출판사에서 만난 시인은 『러브 온 더 락』을 두고 “내 사랑의 기원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시집은 “내 손에 눈물 묻히면 죽을 줄 알아” 말하며 “마음이 난폭해지”(‘GOTCHA’)는 욕망까지 사랑인 걸 알아버린 현재에서 “도넛의 구멍 같은 첫 키스”(‘싱싱한 바닐라 한 송이와 알레르기’)의 낭만적인 과거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2022년 일간지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2023),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2025)을 시 부문 베스트셀러에 연이어 올리며 문단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지난달 기준 첫 번째 시집 5만부, 두 번째 시집 10쇄라는 보기드문 기록을 세웠다. 발행 예정인 단행본만 10여권이다.

쉬운 문법, 가벼운 농담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시인 특유의 서술이 독자를 사로잡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그의 첫 번째 시집 해설에서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농담을 던지고 깔깔 웃는 방식으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 하려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예컨대 고선경은 빚 갚으려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의 불안정한 현실을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
“전전하던 이 집 저 집 통째로 데리고서/스위스에 가고 싶다/빙하가 흐르는 알프스산맥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죽기 전에 못 가보면 어쩌지?/괜찮아, 너만 못 가는 거 아니야//어 그래, 좀/위로가 되네”(‘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제가 실제로 보고 듣고 겪은 것들로부터 시를 쓰게 돼요. 정확하게는 현실을 통과할 때 생기는 균열이나 흔들림을 시로 포착하고 싶은 것 같아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랑이라는 현실의 균열을 살핀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욕망, 그 속에 녹아있는 폭력성을 시로 바라본다. “우리가 거울처럼 서로에게 가해하던 시절/일그러진 얼굴을 사랑스러워하면서 철철 흘려보냈어”(‘누덕누덕’)
“연인 사이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폭력적인 말들로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깨물어주고 싶어’, ‘다 부숴버리고 싶어’ 같은. 그런 게 사랑의 기괴함인 건데… ‘기괴함이 없으면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지?’ ‘이것까지도 사랑인가?’ 같은 제 안의 고민을 시로 썼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물리적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도 담았다. “집에서 경찰을 불렀다 남자 친구가 나를 위협했어요 라이터로요 코앞에서 불을 켜면서 너 같은 건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버릴 수 있다고 했어요…//왜 그랬니?/너야말로 왜 그랬니? 내가 너를 위협하다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러겠니?//그때가 유일하게 남자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남자 친구가 정신과 약 먹는 여자를 싫어해요’)

이제껏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는 청년의 감각을 내세워 온 그다. “많은 것이 너무 빠르게 무너지고 너무 쉽게 대체되는 것 같아요. 관계도, 일자리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그의 말처럼 “무엇 하나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연애는 사치이자, 관리해야 할 시스템처럼 여겨진다. 연애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여럿이 모여 소개팅을 하는 ‘로테이션 소개팅’과 가치관이 맞는 상대를 매칭해주는 ‘소개팅 앱’이 인기를 끄는 이유일 테다.
그럼에도 시인은 “필연적으로 수고스러운 게 사랑”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얘기한다. “굳이 손해를 감수하며 만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선택하고,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것. 우린 그걸 보며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사회에서 그게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요.”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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