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맥'의 원조 베를린, 기차역의 '희한한' 변신

고정희 2026. 5. 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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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오마이 베를린] '날것'의 상징에서 '정돈된 도시'로

[고정희 기자]

 베를린 동물원역. 몇 해 전 깨끗하게 재정비했다.
ⓒ 고정희
지난 27일 라디오에서 희한한 소식을 들었다. 독일 철도회사에서 오는 5월 1일부터 베를린의 동물원역과 동부역 내에서의 음주를 전면 금지한다는 것이다. 쾰른, 함부르크 등 다른 도시에서는 이미 금지했고 그 결과가 좋아서 이제 베를린으로 확장한다고 했다. 아무리 공기업이라 한들 철도회사가 그런 걸 금지할 수 있나? 알아보니 역 부지는 모두 철도회사 소유이기 때문에 가능하단다.

공공질서 확립과 여행객들의 안전을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대놓고 술을 마시는 행위뿐 아니라 뚜껑을 연 채 술병을 소지하는 것도 금지된다. 위반 시에는 퇴거 조치 및 출입 금지 처분이 내려지고, 여러 차례 무시할 경우 형사 고발도 마다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대중교통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나는 기차를 자주 타는 편이다. 독일 기차역이 다른 나라 기차역에 비해 대체로 지저분한 건 사실이지만 플랫폼에서 술 마시는 사람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주로 기차가 정시에 도착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려 있어 못 본 걸지도 모르겠다.

독일 철도의 불성실함은 이미 국제적으로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이고 실제로 정시율이 60% 선이다. 낡은 시설과 인력 부족이 원인이라는데 지난번에 브뤼셀에 갈 때는 무려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음주 금지 운운하니 "너나 잘하세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하, 노숙자들을 몰아내겠다는 뜻이로구나. 베를린 동물원역과 동부역 주변은 노숙자들, 마약 의존자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들의 거점이다. 이 두 역은 분단 시절 각각 동서의 중앙역이었다. 그만큼 도시와 밀착된 곳이다. 통일 이후 삐까번쩍하게 새로 지은 중앙역은 이번 조치에서 제외되었다. 그곳의 차가운 분위기로 보아서 노숙자들이 머물고 싶은 곳은 아닐 듯하다.

길맥의 원조 도시 베를린
 동물원역 맞은편 길에서 길맥하는 여인. 베를린에선 이것이 패션.
ⓒ 고정희
동물원역은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중요한 장소였다. 내가 다닌 베를린 공대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물원역에서 수없이 지하철을 갈아탔다. 그러다가 그 뉴스를 들은 뒤 오랜만에 '취재차' 일부러 동물원 역을 찾았다.

역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맥주병을 든 채 비틀거리고 역 뒤의 노숙자들도 여전했다. 다만 철교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숙자 텐트 단지였던 곳이다. 이미 청소가 시작된 듯 전에 없던 임시 파출소가 들어섰고 경찰차가 여러 대 서 있었다. 안심이 되기보다는 이러다가 베를린이 다시 경찰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몇 해 전부터 베를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제는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에 맥주를 마시면서 가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래서 '길맥(Wegbier)'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편의점이나 강변에서 마신다는 한국의 길맥과는 달리 베를린의 길맥은 실제로 길을 가면서 마신다. 길에서 마셔야 할 만큼 술이 급한 건 아닐 테고 그 세대의 제스처이자 여성의 핸드백처럼 패션 액세서리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는 길맥을 추천하는 베를린 관광 안내서도 있다고 한다. 맥주병을 패션 액세서리로 삼는 것, 이건 정말 베를린에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최소한 동물원역이나 동부역에서는 이 패션도 사라질 것이다. 이 일은 자유와 방종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매력을 유지해 온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에 하나의 굵은 선을 긋는 사건이다. 우리는 흔히 베를린을 '자유의 도시'라 부른다. 하지만 이 자유가 이제는 '청결과 안전'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동물원역의 아이들

과거 동물원역은 서베를린을 상징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전 세계 여행객들이 서베를린과 만나던 곳이었다. 그러나 1970~80년대, 소외와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당시 이 역은 가출 청소년들의 아지트였고, 약물 중독과 성매매가 만연했던 서베를린의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플랫폼 구석이나 화장실, 역사 뒤편에서 술과 약물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약 살 돈을 조달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던 이들의 충격적인 모습을 영화 <동물원역의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14세에 헤로인 중독이 되어 동물원역에서 주삿바늘을 꼽고 성매매하던 여학생의 자전적 소설이 발표되고 곧이어 영화로 만들어져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강력한 경찰 단속을 실시해 노골적인 거리 범죄를 표면적으로는 제거했지만, 노숙인과 마약 중독자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뒷길에는 여전히 주삿바늘 자동판매기가 있었고 남자아이들이 몸을 파는 거리라고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6년 중앙역이 새로 개통되면서 동물원역의 운명도 달라졌다. 중앙역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이용객이 30퍼센트 정도 줄면서 꼭 그만큼 지저분함도 줄어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어둠조차도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가진 '날것'의 매력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곳의 위험함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도시가 품은 비극적인 리얼리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정제되지 않은 삶의 한 단면이었고, 베를린이 가진 투박하고 거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사실 그 근저에는 "남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을 마시든 상관하지 말라"는 개인주의적 자유가 깔려 있다. 독일 철도가 그동안 이를 묵인해 온 것도 이러한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음주 금지 조치는 그 '묵인된 자유'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이제 베를린도 보편적인 공공성을 따라야 한다는 압박이 느껴진다.

베를린답지 않은 베를린에 대한 걱정
 베를린 동물원역 뒤편의 구호시설 앞은 늘 노숙인들로 붐빈다. 앞으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 고정희
동물원역 주변의 풍경은 지난 십수 년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탈바꿈해 왔다. 2015년부터 시에서 큰 예산을 들여 동물원역 일대 재정비 사업에 들어갔고 이후 몰라보게 달라졌다. 역 바로 옆에는 세련된 콘셉트의 쇼핑몰인 비키니 베를린(Bikini Berlin)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통유리창을 통해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며 유기농 라테를 마신다. 인근에는 감각적인 디자인 호텔과 고가의 아스토리아 호텔이 마주 보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이 구역을 꽤 고급스럽고 제법 깨끗한 곳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베를린이 가진 독특함을 깎아내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게 평준화했다. 그러나 노숙인과 소외계층은 여전히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음주 금지령은 이러한 '도시 정화 작업'의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금지됨으로써, 역은 이제 순수하게 이동과 소비를 위한 기능적 공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자유의 도시에서 금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된 환경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남이야 술을 마시건 말건" 상관하지 않던 그 쿨한 무관심이야말로 베를린을 베를린답게 만들던 공기였다.

독일 철도의 이번 조치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드디어!'라고 환영하는 사람보다는 빈정대는 사람이 더 많다. 몇 시간씩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며 그 울분을 앞으로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고, 물병에 보드카를 넣어 가면 된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다. 노숙인들을 사회의 시야에서 - 마치 그들은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 치워버리려는 값싼 시도이며,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또다시 약자를 짓밟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듣고 보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베를린이 좀 깨끗해져야겠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는 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반사적으로 '아니 총리가 왜 베를린 일에 참견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리 관저가 베를린에 있고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브릴론이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베를린에 잠시 다녀가는 손님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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