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분리, 그리고 나를 향한 희한한 공격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8)]

김기협 2026. 5. 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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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II
part 9 / The Unexpected / 예상 못한 길
1965: Down Under / 대전환의 해, 1965년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가 대(大) 말레이시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발표에 충격받은 이야기를 앞에서 했다. 그날 밤 티브이에서 리콴유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분열의 이유가 무엇인지 집으로 오는 동안 생각했다. 리콴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는 것일까? 갈아타는 싱가포르 공항에서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뜻밖의 독립을 축하하는 폭죽 소리가 들렸다. 그 기쁨을 나는 공유하지 못했다. 말레이시아 동-서부 사이의 경제적 연결고리가 사라졌다는 걱정이 앞섰다. 불안감이 깔린 바다의 양쪽으로 펼쳐진 국가가 되었다.

이제 돌아보면, 싱가포르가 당연히 말라야의 일부라는 생각을 너무 오래 갖고 있었다. 런던 있을 때 “말레이시아” 제안 소식을 들으며 주민 대부분이 받아들일 만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62년에 돌아온 후 말레이시아대학 문과 학부장 위치에서 말레이시아를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동료들과 함께 수행했다. 북보르네오 지역을 방문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으나, 싱가포르, 사라와크와 사바 지도자들이 제안한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구호가 충분한 효과를 거둘 것으로 계속 예상했다.

멀리 쿠알라룸푸르(KL)에서 바라볼 때 BS당(Barisan Socialis, 사회주의전선)을 지지하다가 1963년 초 검거된 사회주의클럽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성공을 위해 싱가포르가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연방은 여러 정치조직의 복잡한 결합이고, 지도자들이 그 결성을 위해 조심스러운 협상을 진행해 왔으므로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일체의 불안한 마음을 제쳐놓고 말레이시아에 관한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1964년 〈건국 방략〉 편찬 작업에 착수한 후 1964년 싱가포르 인종폭동의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다. 싱가포르 남양대학 학위의 전국적 인정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교과과정 검토위원회를 내가 주재했는데, 그 보고서를 싱가포르 정부가 분리 후인 9월에 채택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바로 그때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서 첫 아시아초빙교수로(1965년 5-8월) 초청이 왔다. 내 과제는 ANU의 태평양학대학원의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시아에 관한 연구 개발을 도와주는 방안이었다. 결과적으로 ANU의 이 초청이 우리에게 운명적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내 경력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인생까지 바꿔놓는 계기가 될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아시아 연구 현황은 좀 알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일본학과를 갖고 있던 시드니대학에 중국학과 인도네시아학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멜버른에 새로 생긴 모나시대학에 동남아시아 연구센터가 열린다는 소식도 들었다. ANU에서는 아시아학부에서 중국어, 일본어와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치고 아시아문명학과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언어와 문화까지 다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평양학대학원에는 역사학과가 둘인데, 하나는 태평양의 역사를, 또 하나는 극동사를 다뤘다. 역사학과를 또 하나 만들 형편은 되지 않아 태평양역사학과에서 동남아시아사를 시작했다.

ANU에서 내 초청자는 태평양역사학과였는데, 그곳의 짐 데이비슨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싱가포르 말라야대학 출신인 에밀리 사드카, 픙포셍, 치앙하이딩 같은 연구자들을 그곳 박사과정에서 배출했다. ANU에는 우리 지역 출신 학생들이 더 있었는데, 역사 전공은 둘뿐이었고 둘 다 싱가포르 남양대학 졸업생이었다. 극동사학과의 옌칭황과 문학부 역사학과의 용칭팟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출발의 동력은 있었으나 틀이 아직 잡히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 분야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 들었고, 짐 데이비슨은 인근의 다른 대학 상황도 둘러보라고 권했다.

나는 마거릿이 오기를 기다려 다른 학교들을 둘러보러 나섰다. 아들레이드대학의 휴 스트레튼은 동남아시아사 강의 개설을 지지하는 뜻을 보였으나 그 동료들은 중국사와 일본사에 관심이 더 많았고, 나중에 옌칭황이 임용되었다. 멜버른의 모나시대학에서는 존 레그가 앞장서서 동남아시아 연구를 추진하는 분위기가 분명했다.

시드니대학과 뉴사우스웨일즈대학에는 말레이시아 학생이 많았으나 역사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래서 캔버라로 돌아와 ANU 태평양역사학과의 역사학 연구 개발을 권유하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ANU의 자원과 모나시대학의 새 연구소를 합치면 오스트레일리아가 동남아시아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관찰한 결과를 짐 데이비슨에게 보고함으로써 초빙교수로서 임무를 완수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내 위치가 좀 애매하게 느껴졌다. 말라야대학 석사과정부터 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나 지역 중국인 주민의 역사 등 중국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학과장을 맡으면서 말레이시아사와 동남아시아사에 비중을 두게 되었지만,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 더 알려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담당 공무원들이 말레이시아에 관해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건국 방략〉의 편집자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몇 차례 모임에 초청받았다. 캔버라를 떠나기 전날 저녁을 외무부 관리 몇 사람과 함께 했고, 이튿날인 8월 9일 점심도 말레이시아 담당자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 싱가포르 분리 뉴스가 떨어졌다. 그들도 전혀 낌새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장래 연구 방향에 한 차례 선택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중국사에 비중을 둘 것인가, 아니면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역사에 더 집중할 것인가?

1965: Reorient / 새 방향을 찾아

1965년이 대전환의 해였다고 앞서 말했는데, 그 충격은 그해의 후반부, 특히 8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느껴졌다. 8월까지 나는 무척 바쁘게 지냈고, 모든 일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가운데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싱가포르의 분리가 말레이시아의 의미를 손상한다고 생각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충분한 생각을 쏟기도 전에 이 지역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뒤집어놓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스타푸(Gestapu)”란 이름으로 불리게 될 인도네시아의 쿠데타 시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찬에 초대하고 있었는데 내 친구 아스라프와 인도네시아 전문가 제이 마리아노프가 그 자리에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을 때 라디오 뉴스가 들어왔다. 그날 새벽 인도네시아 장성 여섯 명이 암살당한 후 벌어진 일의 보도였다. 공산당의 음모로 보도되었는데,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그런 멍청한 짓을 했을 리 없다고 아스라프와 제이가 말하던 생각이 난다. 그 뉴스가 이후 몇 주일 몇 달 동안 벌어질 참혹한 사태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사태는 PKI의 철저한 파괴라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2백만 명 당원을 가진 PKI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우리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반-식민 민족주의 진영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었다. PKI는 민족주의 성향의 합법적 정당으로 보였다. 그 당이 전국적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 분노 속에 목숨을 잃은 수십만 명 중에는 중국계가 많았고, 더 많은 중국계 주민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해 연말까지 벌어진 상황은 끔찍했다. 얼마 동안은 누구 설명이 옳은지도 알 수 없었다. 전문가인 친구들도 갈라져, 모든 책임이 PKI에 있다는 인도네시아 군부의 공식 발표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수카르노 정권 전복을 위한 군부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카르노의 반-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을 저지하려는 영-미 냉전 전략가들에게 군부의 일부가 포섭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이 사태와 그에 관한 논의를 보며 우리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나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다. 〈건국 방략〉 작업 때 말레이시아를 향한 내 희망이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책이 나온 그해에 일어난 일들은 나를 달콤한 꿈에서 사정없이 두들겨 깨워 험난한 장래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말레이시아의 다민족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국가를 향해 나아갈 길을 찾는 투쟁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다른 일들도 1965년 후반에 파국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의 진격에 따라 존슨 대통령이 확전을 위해 미군을 증파한 일도 그 한 가지였다. 더 북쪽에서는 중국의 권력투쟁이 문화대혁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에 내가 정치적 상황에 직접 개입할 일이 생겼는데, 지역에 파급되어 오고 있던 냉전의 이념투쟁과 관계가 없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쿠알라룸푸르(KL)의 새 대학 건설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막 끝낸 〈건국 방략〉 작업에서도 새 국가의 고등교육 수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양대학의 교과과정 검토위원회에서 청하자 서슴없이 위원장을 맡았다. 1월에 회의를 시작해 5월 내가 ANU로 떠나기 전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내가 주재한 위원회는 이 대학이 제3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다른 대학들과 같은 위상을 누리는 데 필요한 교과과정의 개정을 검토했다. 졸업생들이 다른 대학 출신처럼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모든 위원이 이 목적에 동의한 것은 남양대학 학생들이 최고의 자질을 가진 중국계 학생으로서 국가의 발전에 그들의 공헌이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강의에 계속 중국어를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인정했다. 중국어에 익숙한 학생들이 영어 능력까지 갖춘다면 다른 대학 졸업생들보다 일을 더 잘할 것이고, 그 위에 말레이어 능력까지 갖춘다면 참으로 금상첨화일 것이었다. 이런 졸업생들은 이 나라 다민족사회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대다수 학생이 3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리라는 내 낙관적 전망에 동의하지 않는 위원들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둘 이상의 언어를 쓰게 된다면 학업에 유리할 뿐 아니라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리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남양대학의 위치는 싱가포르지만 말레이시아 전체를 위한 학교라는 전제 위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학교의 교육이 영어나 말레이어를 쓰는 중학교 출신 중에서도 다언어사회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결문제는 싱가포르 정부와 KL 국가정부 양쪽의 승인을 받아 앞서 승인받은 두 개 대학과 같은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보고서 제출 석 달 후 두 나라로 갈라설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캔버라에서 돌아온 후 보고서에 관해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나는 KL에서 학과 일에 빠져 지냈다. 독립한 싱가포르는 이제 자기네 “국가적” 과제들을 재검토하게 될 것이니 우리 보고서는 필요 없게 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정부가 그 보고서를 채택하고 최대한 빨리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9월에 발표할 때 깜짝 놀랐다.

싱가포르의 정치 현안, 특히 연방 가입 여부에 관한 논쟁을 우리 위원회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 위원회는 일체의 파당정치를 피하고 연방 제3대학의 교육적 가치에만 집중하려 조심했다. 그러나 이제 분리를 통해 새 나라가 나타나자 싱가포르 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우리 보고서가 중국어 교육의 미래를 위협하는 내용이라는 야당의 공세로 논란이 일어났다. 이제 싱가포르가 독립했고 주민 다수가 중국인이니 그런 위협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보고서가 폐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공격의 치열함이 상상 밖이었다. 극단적 반응 중 심한 것 하나는 내가 중국어 교육의 파괴를 시도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의 일부 언론의 공격이었다. 이 공격이 싱가포르 권력투쟁의 일부가 되었고 이제 내가 외국인이 되어버린 이상 내가 더 매달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태를 더 덧나게 할 수 있는 반응을 삼가기로 했다.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우리 제안을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인격살해의 행태는 야비하고 파괴적인 짓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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