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꿰매는 일" 그의 바늘이 스친 곳에 남은 작품,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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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재중 기자]
"강릉자수의 한 땀, 한 땀에는 여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그것은 바느질이 아니라, 시간을 꿰매는 일이지요."
그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기척에도 바람처럼 가볍고 깊은 인사만을 건넬 뿐이다. 창으로 스며든 봄빛이 천 위에 내려앉고 그 빛을 따라 바늘이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오간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손놀림이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는 지나온 세월과 삶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시간의 결이 여사의 얼굴에 잔잔히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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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실에서 바느질에 몰두한 김순덕 여사, 한 땀씩 쌓인 자수 작품들에 강릉 여인들의 삶과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 ⓒ 진재중 |
강릉 오죽헌은 오랜 세월을 품은 유적지로, 신사임당과 이이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이제 이곳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한켠에 강릉자수 무형유산 김순덕 여사가 작업실과 전시실을 마련했다. 그의 자수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규방에서 이어져 온 삶의 기록이자 시간의 언어다. 그의 바느질은 오죽헌이 간직한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덧입히며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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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죽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 건물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혼이서려있다. |
| ⓒ 진재중 |
그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가족들 양말을 꿰매던 게 시작이었죠."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중학생이 되던 무렵에는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배움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일부에 가까웠다. 이불을 만들고 해진 옷을 기워 입히는 일은 늘 반복됐고 바느질은 기술이라기보다 가족을 위한 책임이었다.
"어머니가 하시는 걸 보면서 따라 했어요. 그땐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죠."
그에게 바느질은 선택이 아닌 일상이었다. 집안을 꾸리고 가족을 돌보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서 익숙해진 손놀림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가사 시간에 처음으로 자수를 접하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미 바느질에 익숙했던 그는 자수 작업도 금세 손에 익혔고 결과물 역시 또래들보다 뛰어났다. 이를 본 선생님의 칭찬은 그에게 작은 전환점이 되었다.
"바느질이 익숙해서인지 자수가 손에 잘 맞았어요.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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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곱게 차려입은 한복 속에 깃든 김순덕 여사의 자수 인생, 강릉자수의 깊이를 고스란히 전한다. |
| ⓒ 진재중 |
1975년, 김순덕 여사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강릉 지역 여성 모임인 예림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곳에서 만난 성기희 교수(전 가톨릭관동대 가정학과)는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예절도 가르쳐주시고, 전통음식이랑 자수까지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셨어요."
그가 배운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전통을 대하는 자세와 삶의 방식이었다. 예림회에서 전통자수 분과 위원장을 맡은 그는 성 교수 곁에서 보조 역할을 하며 배움을 쌓았고, 이후에는 직접 강단에 서며 전통을 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르치다 보니까, 우리 규방 문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더 깊이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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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질 뻔한 규방의 기억을 자수로 되살려, 다시 삶 속으로 이어가고 있는 김순덕 여사 |
| ⓒ 강릉자수보존회 |
"강릉수보에는 혼이 서려 있어요."
그는 강릉의 수보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며 이를 단순한 공예품이 아닌 스승 성기희 교수와의 인연이자 이어가야 할 유지로 여긴다. 강릉수보자기는 혼례용 보에서부터 떡 목판을 덮는 목판보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색채와 문양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나무와 꽃, 새와 풀, 그리고 작은 벌레들까지, 이러한 소재들은 강릉의 여류 화가이자 문인인 신사임당의 '초충도'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한 땀 한 땀에 마음이 담겨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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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여사는 혼례용 보부터 떡 목판을 덮는 목판보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온 강릉수보자기의 쓰임과 아름다움을 담았다. |
| ⓒ 강릉자수보존회 |
2003년 전국 공예 대전에서 '다기와 자수 찻상'으로 주목을 받은 데 이어, 2009년 강원 공예 대전에서 '자수 이야기'로 수상한 김순덕 자수장은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과 전승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강원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강릉전통자수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반세기 넘게 강릉 전통 자수의 맥을 이어온 그는 지역 자수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온 대표적인 장인이다.
특히 초충도를 자수로 재해석한 작품은 전통 회화를 섬세한 바느질로 풀어낸 사례로 주목받으며 큰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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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자수장에 복원된 방사문 혼례용 강릉자수 보자기(강릉수보) |
| ⓒ 강릉자수보존회 |
그에게도 작업을 잠시 멈춰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눈을 실명하거나 안구가 위축될 수 있는 망막박리라는 예상치 못한 질환이 찾아온 것이다. 수를 놓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 차례의 수술과 회복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한동안 바늘을 잡을 수 없었다. 익숙하게 이어오던 작업이 멈추자 일상도 함께 느려졌다.
"빠른 것보다 한 땀, 한 땀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수를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지요. 바느질이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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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여사의 한 땀의 바느질은 기술을 넘어 삶의 시간이 된다. |
| ⓒ 진재중 |
그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자수로 재해석하며, 이를 단순한 모사가 아닌 자신의 시간을 덧입혀 새롭게 쌓아가는 작업으로 여긴다. 자연을 관찰하고 그 모습을 한 땀 한 땀 옮기는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마주한다. 초충도에 담긴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섬세함이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자수는 옛것을 그대로 되살리는 재현이 아니라, 지금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해석입니다. 전통의 이미지 위에 오늘의 숨결을 더해 새롭게 이어가는 일이죠.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작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자수는 재현이 아니라 해석이다. 과거의 이미지 위에 현재의 감각을 더하며 전통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사라지지 않게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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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충도, 김순덕 자수장에 재해석된 자수 초충도 8폭 병풍 |
| ⓒ 강릉자수보존회 |
그는 전통자수의 기법을 익히는 데서 나아가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 생각은 자수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목걸이와 브로치 같은 장신구부터 보석함, 찻상, 윷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 소품에 자수를 적용하며 전통을 자연스럽게 현재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이러한 작업은 전통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쓰임을 통해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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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계올림픽 눈꽃무늬 자수 |
| ⓒ 강릉자수보존회 |
"자수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전통 공예가 새롭게 주목받는 흐름 속에서도 기대와 함께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겉모습만 차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며, 무엇보다 '진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기법과 지역 고유의 정서가 함께 담겨야 비로소 전통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빠진 작업은 단순한 모방에 그친다는 생각이다. 전통은 상품이 아니라 이야기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문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 자수는 기술을 넘어 삶 자체다. 특별한 극복의 서사로 설명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시간을 이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바늘을 든 지금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리듬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일이기에, 끝까지 의미 있고 아름답게 완성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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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여사의 전통자수는 목걸이와 브로치 같은 장신구를 비롯해 보석함, 찻상, 윷판 등 다양한 생활 소품에 자수를 입혀, 전통 문양이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여준다. |
| ⓒ 강릉자수보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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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신구부터 생활 소품까지 자수를 더해,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
| ⓒ 강릉자수보존회 |
천 위를 오가는 바늘질은 더디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 흐름 위에는 이름 없이 이어져 온 여성들의 삶과 강릉이라는 지역의 시간이 함께 포개져 있다. 그는 전통이란 먼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도 그의 바늘은 묵묵히 천 위를 지나며, 사라질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조용히 이어간다.
인터뷰 막바지, 그는 바느질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말한다.
"강릉자수에는 여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한 땀 한 땀에 담아내는 작업입니다."
김순덕 자수장에게 자수는 생업을 넘어 삶의 방식이다. 시간과 시련 속에서도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그의 꾸준한 손길은 거창한 사명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이어가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으로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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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든이 넘은 손길로 자수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태도와 잔잔한 울림이 전해진다. |
| ⓒ 진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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