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법 위반자에서 헌정 수호자로 높이 평가된 어머니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5. 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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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바로잡은 역사] 어린 시절부터 차별에 맞서 싸운 노동자의 어미니 이소선

[김종성 기자]

 2005년 9월 30일 전태일 거리·다리 조성 및 전태일 기념상 제막식이 서울 청계천 6가 전태일 다리(버들다리)에서 열린 가운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 권우성
노동운동가 이소선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는 전태일의 유언대로 인생 절반을 살았다. 아들 전태일이 분신 항거를 단행한 1970년 11월 13일로부터 82세 나이로 타계한 2011년 8월 3일까지의 41년 생애를 그는 아들의 유지를 지키는 데 바쳤다.

그런데 실은 이소선이 아들의 뜻대로 산 게 아니라 전태일이 어머니의 DNA대로 산 것이었다. 이소선에게 근로기준법을 학습시키고 그의 노동운동을 추동한 쪽은 아들 전태일이지만, 전태일이 노동 차별에 맞서고 평등 세상을 추구한 데는 어머니의 기질적 특성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929년 11월 3일에 폭발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인 그해 12월 30일, 이소선은 경북 달성군 성서면에서 3남매 중의 막내로 출생했다. 소작농 부부인 김분이와 이성조가 그의 부모였다.

그의 아버지는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인물과사상> 2011년 10월호에 실린 최을영 작가의 '이소선: 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는 "소작농이던 아버지는 농민들을 모아 소작료를 내리라는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순사에게 잡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고 서술한다.

일제가 개입한 이 싸움은 항일 소작쟁의다. 이소선은 이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만주사변(1931)을 계기로 일본의 폭압성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에 항일 소작쟁의에 뛰어든 용감한 농민이다.

아버지가 일제와 지주에게 저항하다가 끌려간 날, 그의 집은 밤중에 불탔다. 이 때문에 김분이는 이소선을 업고 마을을 떠났다. 이소선의 오빠와 언니는 그때 외가에 있었다. 그 뒤 김분이는 재혼해 달성군 다사면 박실마을에 정착했다. 정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소녀 이소선은 동네 아이들 중의 유일한 이씨였다. 이로 인해 그는 왕따를 당했다. '데려온 자식'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이소선은 이 차별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제례를 행하는 공간인 마을 재실로 가서 종을 쳐댔다. 그런 뒤 자신도 정씨 성을 갖게 해달라고 마을 어른에게 호소했다.

위 글에 따르면, 정씨 문중은 "무슨 성을 가졌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한 정씨들의 잘못이다"라며 "니가 이씨라고 놀리거나 차별하지 말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줄 것이다"라는 입장을 이씨 소녀에게 전달했다. 그 뒤 이소선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평등 세상'을 향한 그의 승리였다.

어머니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친 아들
 1987년 7월 7일 6.29선언 후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봉쇄된 노조사무실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청소를 하던 중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고 강제로 끌려나왔지만, 7월 15일 새벽 6시 한층 강화된 포위망을 뚫고 조합원 40여 명이 노조사무실 진입에 성공함으로써 노조사무실 봉쇄조치를 풀어냈다.
ⓒ 전태일재단
정씨들의 차별은 사라졌지만, 식민체제의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45년에 그는 강제징용 피해자가 되어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 1993년 5월 3일 자 <한겨레>는 "굶주리고 헐벗던 어린 소녀는 16살 때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기술한다.

이소선은 여기서도 굴하지 않았다. 노예노동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곳에서 도주했다. 위 기사는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 배속돼 강제노동을 하다 극적으로 탈출해 친척집에 숨어 살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알려준다. 이성조의 항일 소작쟁의, 이소선의 반(反)차별 및 대일 항거는 박정희 친일정권하에서 전태일이 벌인 항거와 맥락을 달리하지 않는다.

이소선은 해방 2년 뒤인 1947년에 열여덟 살 나이로 봉제업자 전상수와 결혼했다. 이듬해 8월 26일, 장남 전태일이 태어났다.

전상수의 사업이 망하고 일가족이 서울로 이주한 뒤, 전태일은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말단 보조원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에서 희망을 찾고 어머니에게도 공부를 제의했다. <인물과사상>에 따르면, 1995년 11월호 <우리교육>에 실린 김경태의 '태일아, 내 가슴 속에 사는 태일아'에 이소선의 아래와 같은 말이 실렸다.

"하루는 내가 보따리 장사 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저기 앉아서 배우라는 거야. 죙일 배고픈데 머리에 이고 지고 댕기다 와서 지칠 대로 지쳤는데, 태일이는 '오늘은 근로기준법 몇 조를 배울 것'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힘들고 구찮겠냐? 시간도 오래돼도 하자 하는 거야."

어머니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친 아들은 1970년 초겨울에 분신 항거를 결행했다. 아들이 22년 생을 그렇게 마감한 뒤, 이소선은 또다시 '재실'로 달려가 종을 쳐댔다. 그는 아들이 못다 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하고, 독재정권의 반인권·반노동에도 맞섰다.

그가 싸운 대상들은 정씨 문중과 딴판이었다.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랬다. '기업의 잘못이다', '나라의 잘못이다'라는 반성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투쟁은 1970년대는 물론이고 전두환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 및 1981년과 그 이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법 위반자로 규정했지만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 어머니(사진 가운데)
ⓒ 전태일재단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는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4일이었다. 서울 지역 학생시위에 대응할 목적으로 인천 부평의 특전사 9공수여단이 수도군단에 배속된 다음 날인 이날, 이소선은 닫힌 교문을 사이에 두고 학생 시위대와 경찰 기동대가 대치하는 고려대학교에 대담하게 들어갔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학생들은 4일 밤 10시 6개의 대형 횃불을 앞세우고 스크럼을 짠 채 '계엄 철폐'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한 후 철야 농성에 들어가고 전태일 씨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51)의 강연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밤 그는 청계피복노조의 결성을 설명하고, 학교 밖 노동 현장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했다.

경기도 포천의 13공수여단이 서울 송파구의 3공수여단 주둔지로 이동한 다음 날인 그달 9일, 이소선은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에서 노동현장의 참상을 고발했다. 이날 그는 금속노조원 600여 명과 함께 '노동 3권 보장', '민정 이양',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 복직' 등을 외쳤다. 노동과 관련된 구호뿐 아니라 전두환의 거취와 관련된 구호까지 부르짖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그의 쟁의도 노동과 정치를 넘나들었다.

이 때문에 이소선은 지명수배자가 됐다.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연설과 집회 참석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10월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2월에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징역 1년을 선고했고, 형이 확정된 엿새 뒤에 형집행면제가 있었다.

그는 형집행면제에 감읍하지 않았다. 청계피복노조를 해산하라는 서울시장의 명령이 다음 달인 1981년 1월 6일에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달 16일과 18일에는 보란 듯이 노조 사무실 등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이 때문에 재판에 넘겨져 그해 7월 13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로부터 40년이 흘러 2021년이 됐다. 이소선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경과된 이해 12월 21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1980년 판결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를 계엄법 위반자로 규정했지만, 재심 법원은 그를 헌정 수호자로 높이 평가했다.

법원은 "피고인이 대학생 시국 농성과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고 시위한 것은 시기·목적·대상·수단·결과에 비춰볼 때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검찰의 무죄 구형으로 이 재심은 여기서 확정됐다.

이소선이 1981년 7월에 받은 유죄 판결은 2024년 12월 6일의 재심 판결로 취소됐다. 당시의 계엄법 자체가 위헌·무효이므로 계엄포고령 위반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서울동부지법은 판결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재심도 이 단계에서 끝났다.

전두환이 불법적으로 장악한 1980년과 1981년의 대한민국은 '이소선은 계엄법 위반자'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전두환이 공공의 적이 된 뒤인 2021년과 2024년의 대한민국은 '이소선이 옳았다'라며 법적 평가를 수정했다.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에 따라, 아니 그 자신의 DNA에 따라 노동 차별에 맞서고 평등 세상을 추구했다. 재심 법원들은 그가 옳았다며 손을 들어줬다. 그가 쳐댄 '재실'의 종은 이렇게 뒤늦게나마 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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