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작품 맞아? '어머니 없이 태어난 소녀' 그림이 준 충격
[박홍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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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랜시스 피카비아 <어머니 없이 태어난 소녀> 1916년 |
| ⓒ 퍼블릭 도메인 |
끊임없이 불을 뿜는 기관총이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며 하루에도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물이 되었다. 탱크와 장갑차가 전쟁터를 누비면서 일반 병사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도 전투용으로 발전한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은 전쟁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상대방 대도시를 목표로 한 전투기 폭격은 이제 누가 상대방 도시를 더 빨리 파괴하고 민간인을 더 많이 죽이느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계를 통한 산업 발전이 인류 모두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선사하리라는 믿음도 크게 흔들렸다. 분명히 경제의 외적인 규모는 크게 성장했지만, 사회적으로 빈부격차의 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고통도 증가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간과 기계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옹호만이 아니라, 회의와 비판적인 시각도 터져 나왔다.
기계는 부모 없이 태어난 인간?
프랑스 화가 프랜시스 피카비아(1879~1953)의 <어머니 없이 태어난 소녀>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제일 먼저 그림과 제목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냐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쇠로 만든 바퀴와 이를 돌리는 축, 그리고 균형을 잡아주는 추까지 온통 기계 부품으로 가득하다. 하나로 연결된 모습으로 봐서 철도나 자동차와 같은 기계적 이동 수단의 일부 기관을 묘사한 그림이다. 게다가 화가가 실제로 자기가 본 모습을 그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기계 도면 위에 금색 배경으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덮고, 동력이 전달되는 기관에만 검은색과 녹색으로 칠해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했다.
축이 앞뒤로 움직이면 바퀴가 돌게 되어 있는 기계장치라는 점에서, 또한 제목에 임신에 관한 표현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다분히 성행위를 연상하도록 의도했던 듯하다. 상대가 있는 행위는 아니다. 어머니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기계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어머니 없이 태어났다는 점에서 더 기적에 해당하고, 그만큼 인간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대단한 '사건'임을 나타내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즉 기계 문명의 탄생을 이전 인류의 경험과 정신적 전통에서 분리된,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현상으로 보았던 듯하다.
기계 문명을 찬양한 미래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의 묘사다. 1913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엄청난 기계 기술의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두 해 걸쳐 미래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피카비아는 전쟁을 피해 1915년에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 후 '다다' 운동에 참여했고, 1916년에는 다다 잡지 <391>을 창간했다.
다다주의는 기계 문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살상 무기가 총동원되어 대규모 참상을 초래한 세계대전에 환멸을 느끼고, 기존 과학기술 문명에서 벗어나 비합리성과 우연성을 추구한 새로운 예술 운동이었다. 예술 형식에서도 전통적인 기법을 파괴하고 사진을 오려 붙이거나 색칠을 첨가하는 콜라주나 포토몽타주 등의 파격적 형식을 시도했다.
인간의 기계 의존에 대한 혐오
피카비아가 다다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기계에의 의존과 찬양에 비판적인 관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어떤 식으로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표현했는지를 살펴보자. 피카비아가 주도하여 개최한 다다 전시회를 알리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 <다다 4-5>에는 자신의 작품 <알람시계>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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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랜시스 피카비아 <알람시계> / <다다 4-5> 1919년 |
| ⓒ 퍼블릭 도메인 |
기계 속도에 맞춰 정신과 육체를 사용해야 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이제 더는 인간이 시간의 주인공이 아니다. 반대로 빨라지는 기계 동작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기계적인 시간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피카비아가 참여한 다다 운동의 문제의식을 적용해서 <어머니 없이 태어난 소녀>를 해석해 보자. '어머니 없이 태어난'이라는 말은 서구 사회에 뿌리 깊이 스며든 '동정녀'의 잉태 관념을 떠올리게 한다. 대신 이번에는 어머니의 자궁을 통하지 않고, 오직 이성으로 창조된 기계다. 그만큼 중세의 신을 대신하는 존재로서의 기계에 신성을 부여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듯하다.
또한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실제의 인간 삶과 유리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분명 기계는 처음에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점차 부모 없이 태어난 절대자처럼 인간을 위한 봉사에서 벗어나 인간을 지배하는 상태 말이다. 독자적인 자기 발전 논리와 구조를 갖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이 기계의 인간화와 인간의 기계화에 금빛 환상을 품지만, 인간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괴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에게서 시작된 다다 운동은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최초의 다다 간행물에서 목적을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의 목적은 전쟁과 국수주의의 장애를 뛰어넘어 다른 이상을 추구하려 살아가는 소수의 독자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데 있다."
이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 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량파괴 무기를 양산하고, 인간성을 무너뜨린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죽이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작품에 반영했다.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과 존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기계의 하수인이나 부품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고발했다.
기계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발
인간의 기계 의존과 종속에 혐오를 드러낸 다다 예술의 문제의식은 그즈음 유행한 '생철학'과 통하는 면이 있다. 생철학은 이성 중심의 과학주의로는 인간의 진정한 '생(生)'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중심 역할을 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당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사람들은 현대 문명에 의해 주조된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 대량 학살은 고대인이 상상조차 못 했을 정도로 두려운 것이 되었다. 현대 전쟁은 현대 문명의 산업적 성격에 관련된다. (…) 오랫동안 산업주의와 기계의 사용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리라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악을 기꺼이 이 둘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계 문명이 기존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과학의 진보로 비장의 기술이 개발되어 "지상 위에 패자의 흔적은 남지도 않을 것"이라고 한다. 상대를 절멸로 이끌 결정적인 무기가 개발되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얼마 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결국 한방으로 무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자폭탄이 사용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대 문명의 산업적 성격'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현대 전쟁은 궁지에 몰린 생존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다. 소수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감행하고 사회 구성원이 끌려가는 것도 아니다. 산업사회에서 현대인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다수가 전쟁에 동의한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다.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인간의 욕망에서 희망을 발견했다면, 베르그송은 욕망에서 절망의 가능성도 함께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 자체에 대한 회의나 부정은 아니다. 인간의 지능은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수고로움을 덜 수 있게 했다. 기계를 통한 신체 기능의 확장은 인간의 가장 거대한 물질적 성공이다.
문제는 기계의 이용을 넘어 의존·종속됨으로써 인류가 자신이 이룩한 진보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데서 온다. 기계의 올바른 이용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계가 노동자에게 더 많은 휴식 시간을 갖게 해준다면, 추가로 주어진 여유를 잘못된 산업주의가 제공하는 소위 오락과는 다른 일에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계 발달의 목적은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 확대에 두어져야 한다. 확대된 여가는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 쓰여야 한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서 최근까지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달았다. 지난 백 년 동안 기계 발달로 생산력은 산업에 따라 수십 배에서 수백 배 높아졌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여전히 대부분 하루 8시간이다. 오히려 효율성 논리 아래서 노동 강도가 높아졌다. 임금이라도 생산력만큼 늘었는가? 물가 변동을 고려한 실질임금으로 따지만 약간의 상승일 뿐이다.
여가 확대와 정신적 충족은커녕 기계 발달과 무한경쟁체제가 맞물리면서 정신은 더욱 척박해졌다. 알량한 여가조차 정신적 여유보다는 육체적·물질적 욕망에 더욱 갇혔다. 여가는 점점 더 쇼핑몰·상점·극장·술집 등에서의 향락과 소비로 충당되고 있다. 신체와 영혼 사이의 간격이 더욱 벌어지는 쪽으로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피카비아를 비롯한 다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과학기술 만능주의 아래서 인간이 처한 불안·위태로움·부자유 상황을 반영한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기계화된 인간의 이미지는 20세기 초반보다 최근의 문명에 더 가깝다. 백 년 전 예술가들의 통찰과 상상력이 강력한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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