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에 생명 불어넣는다… 세탁기 혁신 이끈 ‘DD 모터의 대부’

손재호 2026. 5. 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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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의 고수들] ‘33년 외길’ 안준호 LG전자 연구위원
안준호 LG전자 연구위원이 30일 서울 금천구 LG전자 가산R&D캠퍼스에서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모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 안 연구위원은 1993년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33년 ‘모터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공을 인정받아 2012년 직무별 상위 1%에게만 주어지는 연구위원에 선발됐다. 이병주 기자


“기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심장과 같지요.”

안준호 LG전자 연구위원(59)은 ‘산업에서 모터가 갖는 중요성’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세탁기, 냉장고부터 자동차까지 인류의 편의를 책임지는 대부분 기계는 전기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변환하는 모터를 통해 동력을 얻는다는 뜻이다. 안 위원은 1993년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33년간 모터 개발에 매달렸다. 세계 최초 인버터 기반 세탁기용 DD(다이렉트 드라이브) 모터 역시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모터 외길 인생’의 공을 인정받아 2012년 직무별 상위 1%에게만 허락되는 연구위원에 선발됐다. 이제 지겨울 만도 한데, 이 베테랑 엔지니어는 모터 메커니즘을 얘기하며 연신 눈을 반짝였다. 정년 퇴임을 1년 6개월가량 앞두고 있음에도 후배 11명과 함께 ‘제2의 DD 모터’ 개발에 여념이 없는 그를 최근 서울 금천구 LG전자 가산R&D캠퍼스에서 만났다.

‘우연한 선택’이 천직이 되기까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우연찮은 계기로 모터와 가까워지게 됐다. 석사 과정 시절 “취업이 잘 된다”는 선배들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산업 전동력 응용 실험실’에 들어간 것이다. 안 위원은 “학사 때부터 모터를 공부했으면 지겨워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을 수 있다”며 “석사부터 시작했기에 천직이 된 것”이라고 돌아봤다. 1993년 1월 금성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운명처럼 참여하게 된 선행 연구는 다름 아닌 DD 모터였다. 요즘은 모터와 세탁통을 직접 연결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모터 동력을 벨트로 전달해 세탁통을 돌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DD 모터 개발에만 성공하면 에너지 사용량과 진동, 소음을 한꺼번에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세계 최초 DD 모터의 탄생

LG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DD(다이렉트 드라이브) 모터. LG전자 제공

문제는 기술력이었다. 1960년대부터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모터 기술을 축적해 온 LG전자였지만 DD 모터 개발은 기술적인 난도가 매우 높은 도전이었다. 참고할 자료 자체가 부족한 데다 영구자석(반영구적으로 자력을 잃지 않는 자석) 등 핵심 재료도 구하기 어려워 시제품 한 개를 만드는 데만 석 달가량이 걸렸다. 안 위원은 “관련 논문은 전부 읽고, 선배들과 대화도 끊임없이 했다”며 “오전 8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선행 연구 기간만 1년 2개월, 이후 양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LG전자는 1998년 세탁통과 모터가 한 몸처럼 돌아가는 ‘DD 세탁기’를 세상에 내놨다. DD 모터는 첫 생산을 시작한 이래 누적 생산량 1억3000만대를 넘겼다.
모터 외길, 이제 전기차·로봇으로

DD 모터 개발 후 그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에어컨·냉장고에 탑재되는 컴프레서용 모터, 청소기용 모터 등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웬만한 모터는 다 탐구 대상이었다. 수석연구원이 된 이후에는 후배들과 함께 전기차용 모터·충전 기술 관련 선행 연구를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인공지능(AI) 붐이 일면서 그의 시선은 이제 로봇 분야로 향하고 있다. AI가 화면 밖으로 나와 진짜 세상에서 움직이려면 ‘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 위원은 “전기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는 모터 본연의 역할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로봇에 탑재할 모터를 얼마나 경량화하고,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느냐가 모터 향후 기술 개발의 과제가 될 듯하다”며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재료가 나와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 1990년대 일본 같은 존재 돼”

기술 개발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서 급부상 중인 중국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졌다. 30년 넘게 한국과 중국, 일본 제조업의 부침을 일선에서 지켜본 안 위원은 누구보다 기민하게 변화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 그는 중국을 두고 “우리가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해 예의주시했던 ‘1990년대 일본’과 같은 존재가 됐다”고 평가했다. 선진 기술을 흡수·응용한 데다 자국 업체 간 무한 경쟁을 통해 원가 절감 능력까지 키웠다는 것이다. ‘그래도 모터 기술은 한국이 앞서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세탁기용 모터 정도만 한국이 잘하는 것 같고, 나머지 분야는 (중국이) 다 따라온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안 위원은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제조업 기반 국가”라며 “이공계 인력이 끊기면 미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0~90년대 배출된 이공계 인재들은 한국 제조업 부흥의 주역이었으나, 이제 이들의 은퇴 시기가 도래하며 현장의 기술 전수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그는 “단순히 외형적인 스펙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직무 역량을 갖춘 것인지 우리 사회가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략적인 스펙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실질적인 역량이 증명된다면 과감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선택했으면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

내년 말 회사를 떠나는 그의 머릿속은 이제 후배 양성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안 위원은 “실무적인 역량은 후배들이 훨씬 뛰어나다”면서 “실무에 매몰되다 보면 놓치기 쉬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내 마지막 역할”이라고 말했다. ‘제2의 안준호’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어떤 길을 택하든, 일단 선택했다면 흔들림 없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근본 원리로 귀결되고 그 원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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