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아니라 중산모랍니다…서양과 만난 K공예 120년 만에 고국 첫선

강혜란 2026. 4. 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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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예박물관 기획전 2건 동시에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더 하이브리드’를 28일부터 동시에 연다. 사진은 전시에 선보인 서양식 말총 모자. 고종이 미국인 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 Lowell, 1855-1916)에게 선물한 것으로 갓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으로 제작했다. 독일 로텐바움박물관 소장으로 국내엔 이번에 처음 선보인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넷플릭스 좀비물 ‘킹덤’ 시리즈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전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은 조선의 갓. 이미 100여년 전 개항기에도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으로 만든 갓은 서양인들 눈에 흥미로운 복식 소품이었다. 1895년 단발령과 함께 상황이 변했다. 상투 트는 관습이 사라지면서 서양식 모자 패션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이런 과도기에 말총으로 찰리 채플린이 쓸 법한 중산모를 만드는 ‘혁신’이 벌어지기도 했다. 1884년쯤 고종(재위 1863~1907)의 초청을 받아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학자 퍼시벌 로웰(1855~1916)은 말총 중산모를 고종에게 하사받고 이를 ‘하이브리드(혼종)’라 표현하기도 했다.

전통과 근대, 동서양이 교차하던 개항기 전후의 ‘전환기 공예’를 돌아볼 수 있는 전시 ‘더 하이브리드’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총 89건 108점이 한데 모인 가운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 당시 나갔던 공예품 등 총 17건의 유물이 1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에 선보인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저자 로웰이 1909년쯤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말총 모자도 그 중 하나. 독일 로텐바움박물관 소장품으로 당시 말총으로 만든 서양식 모자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품이라고 한다. 27일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채영 전시기획과장은 “공예가 당시 외교와 교류의 매개이자 전화기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더 하이브리드’를 28일부터 동시에 연다. 사진은 전시에 선보인 서양식 말총 모자. 고종이 미국인 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 Lowell, 1855-1916)에게 선물한 것으로 갓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으로 제작했다. 독일 로텐바움박물관 소장으로 국내엔 이번에 처음 선보인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말총 모자가 우리 재료로 서양식을 수용한 형태라면, 프랑스에선 이를 거꾸로 뒤집은 창작 활동이 일어났다. 1890년대말 프랑스 국립 도자 제작기관인 세브르 제작소는 프랑스로 유입된 고려청자 등에서 영감을 받아 단순화된 형태에 최신 플람베(Flambe) 유약 기법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도자’를 다수 만들었다. 세브르는 여기에 한국 도시 이름을 붙였는데 전시엔 ‘서울 화병’ ‘부산 화병’ ‘울산 화병’ 등이 선보인다. 지금 봐도 세련된, 동서양 미감의 조화다.

프랑스에 K도자가 널리 알려진 것은 초대 프랑스 공사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2)의 수집열 덕이 크다.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13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한 플랑시는 2500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이를 세브르도자박물관을 비롯한 주요 프랑스 국립기관에 기증했다. 이번 전시엔 플랑시가 고종에게서 하사받아 세브르도자박물관에 기증한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 등 보물급 유산들도 함께 선보인다.

개항기 무렵 프랑스 국립 도자 제작기관인 세브르 제작소가 프랑스로 유입된 고려 청자 등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하고, 서울·울산 등 한국 도시 이름을 붙인 화병 시리즈.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과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12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더 하이브리드’와'안동별궁, 시간의 겹'을 28일부터 동시에 연다. 사진은 ‘더 하이브리드’ 전시에 선보인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 고종이 초대 프랑스 공사였던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전통 공예가 근대식 생활양식과 결합하면서 변주되는 양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모(바다거북 등껍질)와 나전(전복껍데기 등을 활용한 자개) 장식장은 층고가 높아지고 비교적 넓어진 양식 주택에 맞춰서 길쭉한 삼층장이나 옷걸이장으로 변했다. 길상(吉祥) 무늬 위주였던 표면 도안도 예컨대 관재 이도영(1884-1933)의 금강산 회화를 접목하는 등 다채로워졌다.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과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12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더 하이브리드’와'안동별궁, 시간의 겹'을 28일부터 동시에 연다. 사진은 ‘더 하이브리드’ 전시장 전경.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전시 1동 3층에서 ‘하이브리드’ 전시가 열리는 동안 3동 3층에선 순종과 순정효황후 가례 120주년을 기념하는 ‘안동별궁, 시간의 겹’ 전시가 열린다(8월 29일까지). 공예박물관이 자리한 터는 조선 왕족들이 거주하던 별궁 터였고, 고종 대에 왕실 결혼식이 두 차례나 열리기도 했다. 이 중 하나가 1906년 순종(당시 황태자)과 순정효황후의 혼례다. 또 순종의 배다른 형 의왕((1877~1955, 의화군·의친왕으로도 불림) 부부가 말년에 거처한 곳이기도 했다. 이 같은 장소의 역사와 함께 격동기를 살아간 인물들을 유물 53건 78점으로 만나는 전시다.

의왕비 김덕수(1878~1964)는 1955년 의왕이 숨지기 직전 함께 천주교에 귀의했고, 훗날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대한제국의 복식 유물들을 기증했다. 이를 소장하고 있는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의 협업으로 이뤄진 전시엔 순정효황후와 의왕비가 실제 착용했던 당의와 노리개 등이 대거 선보인다. 특히 의왕이 1906년 책봉식 때 착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원유관’(19세기 말~20세기 초)은 2013년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이후 처음으로 공개된다(5월3일까지, 이후 복제본 전시).

서울공예박물관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과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12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더 하이브리드’와'안동별궁, 시간의 겹'을 28일부터 동시에 연다. 사진은 '안동별궁' 전시에 선보이는 의왕의 원유관(국가민속문화유산).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김수정 서울공예박물관장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전시이지만 우리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당시 시대적인 미감과 앞선 기술을 적용한 점이 이어진다”면서 “이를 통해 그들이 꿈꾸었던 문화강국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기간 동안 대한제국이 해외로 보낸 선물 도자기를 3D 프린팅과 전사 기법으로 재현해보는 ‘공예 체험’(5월 2일부터 7월 25일까지 24회)과 관련 역사를 돌아보는 ‘공예 강좌’(5월 9일, 23일 2회) 등도 진행된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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