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보다 무서운 ‘황플레이션’ 온다…호르무즈 봉쇄의 나비효과

‘세계 경제가 산(酸)의 시험대에 올랐다(An Acid Test for the Global Economy)’.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분석 기사 제목이다. 여기서 산은 황산(黃酸)을 말한다. 중동 전쟁 여파가 원유·천연가스를 넘어 황산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른바 ‘황플레이션(황+인플레이션)’ 우려다.
29일(현지시간) WSJ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등 일부 현물 거래 시장에서 황산 가격이 톤(t)당 800달러에 육박했다. 올 1월만 해도 t당 500달러 수준이었는데 크게 올랐다. 5년 전(t당 150달러)과 비교하면 5배 이상 수준에 거래됐다. 콩고의 한 구리 제련업자는 WSJ에 “한두 달 내 가격이 어디까지 치솟을지 모른다”며 “곧 모두가 황산을 알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황산은 염산·질산과 더불어 3대 강산으로 꼽히는 산성 물질이다. 원유·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황을 원료로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화학 물질 중 하나다. 황산 생산량이 그 나라 화학 산업의 규모를 보여줄 정도다.
이충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황산이 없으면 ‘도금’이란 산업이 존재할 수 없다”며 “구리·니켈 등 금속 정련, 반도체 웨이퍼의 세정·식각 공정, 전기차 배터리 소재 가공 등 거의 모든 제조업에 쓰여 ‘화학 공업의 꽃’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가격 급등의 이유는 전쟁 이후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황산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다. 황산 원료인 원유·가스 주요 생산지가 중동 걸프 국가다. 세계 황 해상 수송량의 절반이 호르무즈를 통과한다. 특히 중동산 원유는 황 함량이 높은 고유황 중질유 비중이 크다.
세계 1위 황 생산국인 중국이 5월부터 황산 수출을 금지하기로 하면서 압박이 겹쳤다. 중국은 지난해 기준 세계 황산 수출의 약 15%를 차지한다. 황산은 인산염 비료 생산의 핵심 원료이기도 하다. 전 세계 황산 사용량의 약 60%가 비료를 만드는 데 쓰일 정도다. 파종 시기가 다가오자 중국이 자국 내 비료 공급을 우선하기 위해 수출 중단 조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황산 공급 차질의 나비효과다. 단적으로 비료 생산에 경고등이 켜졌다. 황산 가격 상승→비료 가격 인상→농업 생산 감소→식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막시모 토레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수석 경제학자는 “(호르무즈 봉쇄는) 단순한 에너지 충격이 아니라 전 세계 농식품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충격”이라고 진단했다.
2008년 원자재 위기로 황산 현물 가격이 t당 800달러 수준으로 급등했을 당시도 아시아·아프리카 등에서 쌀·밀 가격이 폭등해 식량난을 겪었다. 로이터는 “비료 공급이 몇 달씩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러시아가 (세계 주요 밀 생산국인) 우크라이나를 공습한 2022년 곡물값이 급등했을 당시보다 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산을 이용한 구리 제련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구리는 스마트폰부터 자동차와 건설 등 제조업 각 분야에 빠지지 않고 쓰이는 소재다. 경기 흐름을 먼저 짚어줘 ‘닥터 코퍼(구리 박사)’로 불릴 정도다. 골드만삭스는 “황산 부족이 전 세계 구리 생산의 약 17%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짚었다. 구리 생산 비용이 오르면 전기차·배터리 산업 전반의 원가 부담도 커진다. ‘보이지 않는’ 기초 소재 가격 급등이 초래하는 공급망 위기의 대표 사례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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