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이름이 잘못되면 일을 그르친다

예영준 2026. 4. 30. 00:2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영준 논설실장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극장에서 보았다는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 4·3사건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그린 영화다. 어릴 때 겪은 4·3의 트라우마로 여덟 살 이전의 기억을 깡그리 상실한 채 다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온 초로의 여자 주인공이 먼 기억의 심연에 남아 있는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 주된 스토리 라인이다. 왜 감독은 ‘이름’을 스토리의 축으로 삼고 제목까지 붙였을까. 인생의 무게가 응축된 이름 석자야말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하기에 감독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바른 삶의 첫째 요건은 높은 지위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 이름이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규정
공자 정명론, 이름 바로세우기 설파
통일부, 북한 대신 조선 명칭 공론화
정명론에 가장 어긋나는 북한 국호

비단 개인의 인생만 그럴까. 내 이름에 내가 책임지는 일뿐 아니라 타자나 객체에 대한 이름짓기 또는 부르기도 다를 바 없다. 내가 어떤 대상을 무엇이라 부르느냐의 문제는 당연히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의 반영이다. 동시에 한번 붙인 이름은 나의 인식을 규정하고 결국은 행동을 규정하는 상호작용을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는 문학이 아닌 언어철학의 견지에서도 무릎을 칠 표현이다. 인지심리학자들은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선택과 행동이 달라지는 프레이밍 효과를 반복된 실험으로 입증해 보였다.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평화공존을 위한 이름 부르기-북한인가, 조선인가'를 주제로 열린 2026 한국정치학회 특별학술회의에서 사회를 맡은 권만학 경희대학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제 ‘평화공존을 위한 이름 부르기 : 북한인가 조선인가’란 주제의 특별학술회의가 열렸다. 한국정치학회 주최였는데, 실은 후원자로 이름을 올린 통일부의 의지가 크게 반영된 행사라고 한다. 앞서 정동영 장관이 다른 학술회의에서 ‘남북관계’ 대신 ‘한조관계’라 발언하는 등 호칭 변경의 화두를 던졌고,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화의 장으로 삼겠다는 것이 통일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말은 공론화인데, 막상 발제자 두 사람의 발표는 찬반 양론이 아니라 모두 호칭 변경에 문제가 없다거나 필요하다는 긍정론 일색이다. 공론화란 이름을 빌려 긍정론을 전파해 세력을 불리고 결국은 굳어지게 만들려는 빌드업의 과정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북한이 유엔 가맹국이고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대접받고 있으니 현실에 맞게 부르자는 발상이 호칭 변경 주장의 배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한을 DPRK로 부를 때엔 그냥 고유명사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명하는 측이 대한민국이 될 땐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로 명기한다. 이어지는 헌법 4조는 자유민주질서에 기반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 남북총리회담을 거쳐 1992년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명시하고 있고, 이 표현은 현행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그대로 인용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나라’가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조항은 진보 정권 때 몇 차례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이나 총리 회담의 합의문 작성 과정에서도 금과옥조로 여겨졌다. 요컨대 위헌 소지를 차치하더라도 북한 호칭 변경은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35년 가까이 이어져 온 남북관계의 원칙과 근간을 흔드는 것이란 논란을 피할 길이 없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더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적대의 종식과 평화공존을 위한 한반도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통일부-통일연구원 공동학술회의에서 개회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남조선’이란 호칭 대신 ‘대한민국’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니 우리도 북한의 정식 국호를 불러주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북한의 호칭 변경은 선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2국가론 앞에는 반드시 ‘적대적’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가 조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갑자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때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 남북간 회의나 모임에선 서로 ‘남측’ ‘북측’이라 부르며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과거의 호시절을 추억하느라 냉철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순 없다. 다 떠나서, 왜 하필 지금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이 2국가론을 들고 나오기 전에 먼저 우리 통일부가 호칭변경론을 꺼냈다면 북한 입장을 추종하는 것이란 오해를 사진 않을 것이다.

정명론(正名論)은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의 대답은 간명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 논어 자로편은 이렇게 설파한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리에 어긋나고, 말이 순리에 어긋나면 일을 이루지 못한다(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따지고 보면 북한의 국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야말로 정명론에 가장 위배되는 명칭이다. 정녕 북한이 민주주의 국가이고 인민을 위하는 인민의 공화국이란 말인가.

예영준 논설실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