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등쌀에… 반장선거·상장·운동회 점수판 사라진 교실
“우리 애 패배감 준 건 정서적 학대”
별별 민원에 경쟁·갈등 소지 차단
학교·교육청이 교사 책임 나눠야

서울 관악구의 한 초등학교는 모든 학년에 반장 선거가 없다. 대신 학급당 2명이 짝을 이뤄서 한 달간 임원을 맡는다. 학교는 매달 새 임원이 된 학생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다. 이 학교는 전교회장도 더는 뽑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학교자치회의에는 5·6학년 학급 임원들이 참석한다. 사실상 모두가 참여하는 활동이 되다 보니 반장 같은 임원 활동은 생활기록부에 기록하지 않는다.
이 학교가 반장 선거를 없앤 건 표면적으로는 ‘모든 학생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 경쟁 과열을 줄인다’는 명분에서다. 하지만 쏟아지는 학부모 민원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반장 선거를 둘러싼 잡음에 대한 피로감이 감지된다. 이 학교 교사 A씨는 29일 국민일보에 “투표 집계에 자그마한 실수 하나만 있어도 ‘부정선거’ 논란을 운운하거나 ‘우리 애는 왜 떨어진 거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학부모가 있다”며 “차라리 반장 선거를 안 하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통상 반장 선거는 다수결 원칙이나 비밀투표 원칙 등을 학습하는 기회로 인식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사실상 ‘스펙 쌓기’의 일환이 되거나 ‘인기투표’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한 30년 차 초등학교 교사는 “서울 강남권에서는 스펙을 쌓으려고 반장 선거 등에 대비한 전용 스피치 학원이 있을 만큼 준비 열기가 치열하다”고 전했다. 이러다 보니 선거에서 떨어진 학생의 박탈감 등을 문제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기야 반장 선거를 없애는 학교까지 나온 것이다.
이 학교는 책을 많이 읽은 학생에게 주는 ‘다독(多讀)상’을 제외한 모든 상장도 없앴다. 또 다른 수도권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상을 못 받은 학생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느냐’고 항의하면서 전교생 앞에서 상을 주는 관행도 없어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운동회 풍경도 변하고 있다. 상당수 초등학교에서 승패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청군·백군 점수판을 없앴다. 한 교사는 “아이들에게 패배감을 경험하게 하는 게 ‘정서적 학대’라고 주장하는 학부모도 봤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는 최근 ‘점심시간 축구 금지령’을 내렸다. 학교 측은 급식실 앞에서 식사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학생들끼리 축구를 하다 다투는 일이 생기자 ‘왜 축구를 하게 놔뒀느냐’는 학부모 민원이 이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학교 밖은 경쟁 사회인데 학교 안에서의 경쟁 경험 자체를 없애면 학생이 추후 사회에 나가 느끼게 될 좌절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교육계에서는 학부모의 과도한 학교 운영 개입을 견제하고 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교사의 책임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 명예교수는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독박 씌우는 게 일상화되다 보니 문제가 생길 일은 안 만들려 하는 것”이라며 “학교나 교육청이 책임을 나누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교사가 지나치게 책임을 피하려 한다는 시각도 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의 중심은 결국 학생이 돼야 하는데 교사들이 민원을 핑계 삼아 교육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 건 책임 회피”라고 말했다.
김다연 기자 y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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