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에서 하얼빈으로, 다시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장애라 2026. 4. 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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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한 세계평화의 의미

[장애라 기자]

▲ 일본관동법원내 소계단. 법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 계단이 안중근 의사가 올라간 곳,.
ⓒ 장애라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내가 남긴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안중근 '동포에게 고함'에서.

이상기후로 사계절이 흐릿해졌다지만 한반도의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뭇 사람들에게 춘소일각 치천금(春宵一刻 値千金: 봄밤의 한 순간은 천금의 값어치가 있다)을 깨우치려는 듯 금방 꽃잎이 난분분 흩날린다. 싱그러운 새잎이 나무를 연록으로 뒤덮던 날, 오래전부터 예정해 둔 안중근 의사 순례 일정을 따라 요동 반도로 향한다.

비행기로 불과 1시간 남짓, 요동 반도 남쪽 끝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이 이제 막 한두 송이 꽃을 피울 뿐 아직 겨울이 머물러있는 것 같다. 잔뜩 흐린 날씨를 헤치고 여순 일본관동법원에 들어선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한국통감부 초대 통감)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재판 후 사형을 선고받은 곳이다. 그가 올랐을 계단을 따라 법정에 들어선다.

판사 앞에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의거한 자신을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한 그는, 주변 나라의 평화를 짓밟은 간악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한다. 이어 항소를 쓸데없다 여겨 포기하고 의연하게 순국을 택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난 중인 고국의 역사와 다름없는 자전적 기록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매진하다 사형대에 오른다.

법원에는 그가 힘 있고 당당한 필체로 쓴 유묵들을 복사하여 전시 판매하고 있다. 자신이 가두고 감시하던 사형수에게 글을 부탁하는 일본인, 또 부탁받은 글을 써주면서 '대한국인 안중근' 서명을 하는 상황을 현장에서 상상하니 그의 인품과 기개에 '고결함'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 안중근 의사의 유묵. 안중근 의사의 유묵 복사본 전시(여순 일본관동법원)
ⓒ 장애라
법원을 나와 그가 잠시 머물렀다가 순국한 여순감옥을 향한다. 공사 중이라서 출입금지다. 멀리서 여기까지 왔는데도 끝내 관람을 거절당한다. 굳게 닫힌 문틈으로 그가 있던 옥사와 사형장 위치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어디선가 바다 냄새가 난다. 시간은 다르지만 안중근 의사도 이런 공기, 이런 냄새를 맡으며 같은 공간에 있었다 생각하니 그가 더이상 먼 역사 속 애국지사가 아니라, 고국을 향한 사랑과 염원으로 가득한 가까운 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직접 보지 못한 채, 문밖에서 상상으로만 바라보는 관람은 오히려 더 애틋한 경험이 된다.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달라'던 유언이라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순례 떠나기 직전, 우연히도 안중근 의사의 묘지 관련 기사를 접하고 무척 설레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감옥 가까운 산 중턱 주변 환경이 1910년 당시 일본 신문에 묘사된 것과 놀랍게 일치하여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발굴 작업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 여순 감옥 부근 바다. 여순감옥 가까이에는 황해와 발해가 서로 마주치는 바다가 있다.
ⓒ 장애라
곧 이곳 대륙에서 그가 간 길을 뒤따라 가겠지만 그가 영면한 여순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발걸음이 무겁다. 떠나기 전에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고 싶어, 그가 하얼빈에서 열차를 타고 도착했던 여순역을 찾는다. 빛나는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용수를 쓴 채, 마차에 실려 감옥으로 향했던 장소다. 여순 감옥 도착 순간부터 사형 순국일까지, 이곳에서 직접 알게 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은 같은 대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여순을 떠나는 길, 자꾸만 뒤돌아보는 눈에 바다가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흐린 바다에 총총히 떠 있는 배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왔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만주 진출로 얼룩진 대련시는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며 크게 달라졌지만 지나간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뚜렷하다. 고유한 양식을 간직한 러시아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아직도 사용 중이라 한다. 아마 전쟁이 남긴 황폐한 상처에 대한 기억도 애써 드러내지 않을 뿐, 그 안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일 것이다. 우주선이 오가고 AI가 문명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 소식이 들려온다.

안중근 의사가 목숨으로 외쳤던 평화론을 생각한다. 당시 일본제국이 침략을 합리화하면서 주창한 평화론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완전히 다르다. 이른바 일본처럼 앞서 발전한 나라가 한국을 비롯한 미개발·후진국들을 개발시켜 하나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라면, 안중근 의사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다르듯 국가도 다양함과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독립한 상태로 동맹과 화합으로 동양과 세계평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일본의 평화론은 약육강식이고 그에 비해 안중근 의사는 풍요로운 다양함 속에서 모두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형시간에 쫓겨 감옥에서 집필 중이었던 그의 '동양평화론'은 처음 시작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개한' 조선의 한 필부가 깨달은 평화의 본질은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전해 온 오늘의 문명 앞에서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가 더욱 절실히 귀 기울여야 할 평화의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 만주벌판. 대련에서 심양, 장춘을 지나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안에서 촬영
ⓒ 장애라
대련역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선택한 풍찬노숙의 길이다.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기차를 타고 북쪽에서 내려와서 서울울 거쳐 부산으로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다시 한반도 북쪽 끝으로 간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를 이끌었을까? 그의 평화를 향한 투신이 거룩하다. 대련역에서 하얼빈까지 고속철로 거의 천 킬로미터. 살아 있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여순으로 압송되어 온 길이자, 죽은 이토가 시신이 되어 되돌아간 길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여정이다. 대련, 봉천(심양), 장춘, 그리고 하얼빈에 이르는 기찻길, 창밖은 가없이 펼쳐진 광활한 들판, 유명한 만주 벌판이다.

생존을 위해 이곳 물설고 낯선, 만주로 온 조선의 백성들은 그 척박한 땅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초목이 푸르기 시작한 한반도에 비해 이제야 봄이 시작되는 이 추운 땅에서 벼농사의 기적을 이룬 사람들, 그 모진 고생의 시간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번 순례길에는 특히 중국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투자를 많이 한 관광지라는 이유도 있지만, 숙소의 작은 물건에서 거리의 건물들, 대중교통에 이르기까지 발전이 눈에 띈다.

거대한 대륙, 끝없는 평원, 무한한 자원, 또한 그 자원을 개발, 이용할 인적 자원도 풍성한 나라. 그에 비해 자원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하고 다시 수출하면서 살아온 우리나라. 이 만주 벌판을 옥토로 가꾼 우리 선조들처럼, 고난을 딛고 경제를 일구고 문화강국을 이루면서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렇게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자는 게 안중근 의사의 큰 뜻이 아닐까.
▲ 731 세균부대전시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전시하는 곳, 만주 하얼빈
ⓒ 장애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미개국을 계몽시킨다는 미명하에 자행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하얼빈에는 그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있다. 침략한 나라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세균전 연구와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일본이 패망하면서 폭파했으나 그 잔해를 모아 역사박물관으로 만든 곳, 특별하게 생긴 건물 앞에 '침화일군 제731부대 죄증진열관'이라는 큰 표지석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의 증거를 마주하게 하는 공간이다.
표지석 옆에는 메마른 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서 있다. 마치 무심하고 건조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듯하다. 평범한 마음으로는 견디기 힘든 곳이리라 짐작한다. 영화보다 더 잔혹한 전시물들을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넓은 부대 마당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마 못 볼 것을 본 이후 충격이 컸던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것을 바로 '의거'-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이 사사로운 이해타산을 생각함이 없이 일으킨 행동-라 한다.
▲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곳. 역 바닥의 세모 표시는 당시 안중근 의사의 위치, 네모 표시는 이토의 위치
ⓒ 장애라
무거운 마음으로 하얼빈역을 향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루어진 하얼빈역은 그날 그가 총을 쏜 자리와 이토가 총을 맞은 자리를 표시하여 보존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의 군인(당시 적에 맞서 싸운 모든 백성은 의병이었다)이 평화를 파괴하려는 침략국 원흉을 처단한 역사적 장소에서 오늘도 대륙을 잇는 기차가 떠나고 또 들어선다.

"하얼빈역 철길은 총 맞기 좋은 자리다."
"나는 철도를 좋아한다. 쏘기도 좋은 자리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대화에서(김 훈 작가의 '하얼빈')

많은 작가들은 가혹한 일제강점기의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 등지에서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조선인들과 그들의 강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리 책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만주 벌판을 달려 이곳 하얼빈역까지 직접 와보니 이제야 잘 알 것 같다. 길과 길이 이어져 있듯 그들과 우리 또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순례의 큰 깨달음이다. 이제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역에 두고 떠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남았을 그의 흔적을 다시 찾아본다. 당시 하얼빈공원으로 불리던 조린공원, 여기서 그는 동지들과 의거 계획을 논의했다. 그 공원 밖 사진관에서 동지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는 순국 전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겼다. 공원을 나와 그가 잠시 묵었던 김성백 집터를 찾는다. 원래 있었던 2층 목조 가옥은 사라지고 서민들이 사는 평범한 길가 주택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운 그곳을 서성이는 동안, 하얼빈역 앞 광장은 환한 빛으로 내내 떠올랐다.
▲ 하얼빈역 광장.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코레아 우레!'(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역 광장
ⓒ 장애라
하얼빈 광장을 가득 채운 밝은 햇살, 역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 그가 그토록 원했던 평화는 그 하늘처럼 맑고 푸르고 무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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