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내가 공연 의상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요”
2016년 연극 ‘햄릿’부터 무대 의상 감독으로도 활약

최근 서울에서 막을 내린 뒤 오는 5~6월 지역 투어가 예정된 연극 ‘홍도’는 1930년대 인기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2014년 초연과 2016년 재연에 이어 올해 극단 마방진 20주년을 기념해 다시 무대에 올렸다. 특히 올해 공연은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이 의상 감독을 맡아 고선웅이 의도한 한국적 미장센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난히 눈에 띄는 홍도의 화사한 한복은 미니멀한 무대와 대비돼 비극성을 극대화했다.
디자이너 김영진은 2004년 시작한 전통 한복 맞춤 브랜드 ‘차이 김영진’과 2013년 한복에 현대적 디자인을 더한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의 대표다. ‘차이’는 ‘다르다’는 뜻의 그 차이(差異)를 의미한다. 사람이 각각 다르고, 작은 차이가 좋은 옷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동안 그룹 방탄소년단, 모델 나오미 캠벨, 배우 틸다 스윈턴 등 세계적 스타들이 그의 한복을 구매했다. 영화 ‘해어화’ ‘조선마술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등에서 주인공의 한복도 그가 만든 것이다. 또 이탈리아 밀라노 엑스포,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등 세계 디자이너들이 주목하는 무대에서도 그의 한복이 선택됐다. 그는 또한 문화유산청이 한국 방문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한 홍보 영상의 총감독으로 위촉돼 ‘공주의 하루’(2020)와 ‘공주의 꿈’(2021)이라는 콘셉트로 풀어냈다. 일본 패션 잡지는 그를 가리켜 ‘한복계의 샤넬’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한복을 살아 숨 쉬는 동시대 패션으로 격상시킨 그에게 다양한 분야의 러브콜이 쇄도하는 것은 당연지사. 바쁜 와중에도 그가 애착을 가지고 놓지 못하는 것이 무대 의상 디자인이다. 2016년 극단 신시에서 손진책 연출가가 박정자, 손숙 등 원로 배우 9명과 함께 선보인 연극 ‘햄릿’은 그가 본격적으로 무대 의상을 시작한 작품이다. “전설 같은 선생님들과 작업하는 것이 쉽진 않았던 만큼 공부가 됐다”는 그는 지금까지 국립오페라단의 ‘동백꽃 아가씨’(2017) ‘화전가’(2025), 국립창극단의 ‘심청가’(2018) ‘귀토-토끼의 팔란’(2021) ‘베니스의 상인들’(2023), 국립극단의 ‘화전가’(2020), 국립무용단의 ‘행+-’(2024) 등 시대극이나 전통 기반의 공연에 꾸준히 참여했다. 영화나 드라마와 비교해 예산이 턱없이 적은 공연을 선택하지 않는 게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에겐 재밌고 신나는 작업이었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라는 김경미 시인의 시집이 있는데요. 시에서 이야기하는 ‘세계’가 제게는 연극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이 바다나 작약처럼 순수하지 않지만, 제겐 소중한 존재인 거죠.”

최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의 차이킴 아틀리에에서 만난 그에게 무대 의상을 꾸준히 하는 이유를 묻자 되돌아온 대답이다. 앞서 다수의 기사나 인터뷰에 잠깐 언급되긴 했지만, 그는 20대에 연극배우로 잠깐 활동했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그는 고교 졸업 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출과 연기를 배웠다. 공연예술아카데미에는 김석만(연출), 최영인(연기), 신선희(무대미술) 등 당시 내로라하는 창작자들이 교수들이 포진했다.
“공연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판소리와 탈춤을 배우는 등 전통적인 것에 끌렸어요. 그때는 뮤지컬이나 서양 연극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우리극연구소에 들어가 연기를 했는데, 그때는 배우들이 한복이나 소품을 직접 만들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금세 배우 활동을 접었습니다. 어쩌면 그 짧은 경험이 연극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은 것 같기도 해요.”

생활 전선에 나선 그는 국산 캐주얼 브랜드 GV2를 거쳐 이탈리아 명품 남성복 브랜드 체루티 매장에서 판매 사원으로 입사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그는 금세 슈퍼바이저(매장 관리자)가 됐다. 그가 원단 구매부터 브랜딩까지 책임지면서 체루티의 매출은 급성장했다. 또 브랜드 루이뷔통의 남성복 슈퍼바이저로 스카우트 되는 등 그는 10년간 패션업계에서 맹렬하게 활동했다. 이후 건강 문제와 가족을 위해 회사를 그만둔 그는 한복 만드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지만 금세 한복의 매력에 빠져 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고(故) 박선영 침선장에게 가르침을 받는 등 한복에 파고들었다. 주변의 지인들 부탁으로 한복을 하나둘 만들어준 것이 입소문이 났다. 결국, 2004년 연희동에 한복집을 조그맣게 낸 것이 지금의 ‘차이 김영진’와 ‘차이킴’으로 성장했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예술품과 고객을 연결하는 아트 컨설턴트로 잠깐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 경험을 토대로 직접 연희동에 작은 갤러리를 내는 한편 그 지하에서 제 한복을 전시했어요. 이런 방식이 당시 한복계에서는 남달라서 주목을 받았어요. 여기에 원단 회사로 유명한 체루티에서 일한 덕분에 다채로운 원단을 활용한 제 한복이 특별하다는 반응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전통적인 한복은 기본 형태가 있기 때문에 디자인 자체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비율과 라인 위에 원단, 색상, 자수 등을 통해 변화를 준다. ‘차이 김영진’의 한복은 기존 한복에선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원단들을 활용해 자유롭고 몽환적인 느낌까지 든다.
“저는 한복 장인이 아니라 디자이너에요. 기존의 한복 장인들은 디자인부터 바느질은 물론 판매까지 모두 하는데요. 저는 패션계의 분업화된 시스템을 한복에 도입했어요. 제가 고객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디자인에 집중하고, 바느질은 저와 함께하는 장인에게 맡기는 거죠. 한복을 하시던 분들이 제 방식을 황당해 했지만, 샤넬도 바느질하지 않았어요.”
‘차이 김영진’을 통해 한복에 새 바람을 일으킨 그는 전통 디자인의 한계를 벗어나 좀 더 독창적인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사당패의 자유롭고 노마드한 감성을 기본 콘셉트로 한 기성복 브랜드 ‘차이킴’이다. 주로 린넨, 면 등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해 편안함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무관의 관복이던 철릭을 모티브로 한 ‘철릭 원피스’를 비롯해 트렌치코트같이 입을 수 있는 배냇저고리, 재킷으로 만든 연암김씨저고리 등은 세련된 연출이 가능해 인기가 높다. “한복이라는 원리를 토대로 하되 김영진이라는 필터링으로 새로운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연극배우와 명품 의류 슈퍼바이저 그리고 한복 디자이너. 그가 걸어온 길은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무대 의상 감독으로서 빛을 발하기 위한 요소들을 채워나가는 시간이었다. “젊은 시절 몸에 밴 연극 정신이 계속 남아 있어서 지금 디자이너로서 돈이 되든 안되는 작품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 같다”는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품고 있다. 작품 속 캐릭터에 맞는 의상을 만드는 것을 넘어 작품의 미장센 전반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에 대한 바람이다.
“우리나라 공연계에서 연출가들이 캐릭터 분석을 열심히 하지만 시각적인 요소를 활용하면 단번에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연극계가 힘들어도 시각적인 부분에 좀 더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생각이 잘 맞는 연출가, 배우들과 함께 미장센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그가 의상 감독으로 참여한 국립극단의 신작 ‘반야 아재’가 5월 22~3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제정 말기 러시아가 배경인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도영 선두에 최정·장성우 가세…홈런 레이스 ‘토종 강세’
- 초등 교감이 교무실에 몰래 카메라 설치…교사노조 반발
- 휴지에 ‘카메라 접착제 추정 물질’…여성 피해 후 20대 남성 자수
- 착륙 30분 전 기내에서 출산한 임산부…신발끈으로 탯줄 묶어
- 반려동물 예쁘긴 한데…‘돌봄 부담’ 너무 크다
- “이자 6%·캐시백 3%”… 머스크, X로 금융 비즈니스
- 유명 인플루언서 사기 의혹…경찰의 ‘이상한’ 대질조사
- 넷플릭스, 韓 법인세 소송 사실상 승소…“687억 취소”
- 박민식, 북갑 노린 하정우·한동훈에 “2년 뒤 떠날 메뚜기 정치”
- 구글 번역기, ‘독도’는 ‘다케시마’로…‘김치’는 ‘파오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