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이 쓴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무대

이완우 2026. 4. 2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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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창건된 천년 사찰로,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된 남원 만복사지

[이완우 기자]

 남원 교룡산 원경. 가운데 교룡산에서 오른쪽으로 낮게 기린산과 복음봉이 보인다. 이 복음봉 오른쪽 아래에 만복사지가 있다. 앞의 냇가는 요천.
ⓒ 김태윤
지난 27일, 남원 기린산 복음봉 아래 자리한 천년 사찰의 터 만복사지(萬福寺址)를 찾아갔다. 남원 만복사는 교룡산에서 남쪽으로 파생한 산줄기의 기린산 복음봉 아래와 축천(丑川) 사이의 경사지에 터를 잡은 고려 시대의 가람이었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하는데, 정유재란(1597년) 때 남원성 전투를 거치며 거의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만복사지 가까이 150m 거리에 축천이 돌아서 흐른다. 고려말(1380년)에 지리산 황산에서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대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원성에 들렀다가 축천변의 강정(江亭)에서 쉬었다 갔었다. 훗날 조선이 건국되고 왕이 머물렀다 하여 이곳 마을(강정몰)을 왕정(王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원은 남쪽의 요천(蓼川)과 북쪽의 축천 사이 충적지에 형성된 고을이다. 광한루 앞을 흐르는 요천에는 소 바위가 있었다. 남원의 형세가 행주지형(行舟之形)이라 닻을 내리거나 소를 매어두어야 한다는 풍수설이 전해왔다. 축천(丑川)은 수철(水鐵, 무쇠)로 소 형상을 조성해서 냇가에 세워두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만복사지는 부처 뒤의 광배처럼 보이는 기린산 복음봉 앞에 잔디밭으로 펼쳐져 있다. 남원의 상징인 교룡산(519m 복덕봉, 밀덕봉)에서 2km를 달려온 기린산(239m). 기린산에서 다시 1.3km의 산줄기가 내려와 멈춘 구릉 형태가 복음봉이다.

만복사지는 너른 잔디밭에 띄엄띄엄 놓인 주춧돌과 석조 유물만이 너른 들판을 지키고 있었다. 넓은 잔디밭에 5층석탑, 불상좌대, 당간지주, 인왕상과 석불입상 등이 현재 절터에 남아있다. 차례로 석조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남원 기린산 복음봉 만복사지
ⓒ 이완우
 남원 만복사지 인왕상,
ⓒ 이완우
텅빈 절터가 충실한 '여백의 미'로 느껴졌다. 첫눈에 들어온 높이 약 2.9m의 거대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 여느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인 인왕상은 입을 벌리고 있는 '아형'(시작 의미)과 입을 꽉 다문 '훔형'(끝 의미)이 한 쌍을 이룬다.

본래 인왕상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영향으로 그리스의 헤라클레스가 불교의 수호신으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초기의 모습은 중앙아시아의 아리안족이나 헬레니즘 계통의 외양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문지기 신'의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남원 만복사지의 인왕상은 부릅뜬 눈, 매부리코처럼 우뚝 솟은 코, 깊게 파인 눈매로 다른 사찰의 한국적인 모습보다 서역인(西域人)의 외양을 띠고 있다.

김용근 향토사학자가 이곳 인왕상과 가까이 세워진 당간지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인왕상은 절 입구에 세워져 당간지주 역할도 한 것으로 추측돼요. 만복사의 영역을 알리는 커다란 번(幡, 깃발)을 달았을 거예요. 저곳에 있는 당간지주는 법당 앞에서 괘불(掛佛, 그림 부처)을 걸었고요."

인왕상이 당간지주 역할을 겸했다고도, 당간지주에 인왕상을 조각했다고도 여길 수 있는 만복사지 인왕상은 분명 개성적인 양식으로 보였다.
높이 약 3.5m의 거대한 장방형 당간지주 한 기(두 기둥). 석주(石柱)의 거칠게 다듬어진 표면에서 천년의 세월을 버틴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만복사 법당 앞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거대한 괘불이 이 당간지주를 의지해 중생들 위로 장엄하게 펼쳐졌을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 이완우
 (상)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하) 남원 만복사지 석조좌대
ⓒ 이완우
높이 5.5m의 오층석탑. 맑게 트인 하늘 아래, 층층이 쌓인 석탑은 단단한 균형감으로 서 있었다. 오랜 시간을 묵묵히 버텨온 존재감이 드러난다. 거대한 팔각 석조좌대. 낮게 자리한 석조좌대는 오랜 풍화가 진행된 조각의 흔적에서도 천년의 숨결이 전해진다. 햇빛을 받은 돌의 색감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피어난다.

고구려의 숨결, 남원 국악의 뿌리가 되다

석조좌대 가까이에 가람 터로 보이는 유적이 모여있다. 만복사지는 '1탑 3금당'의 고구려식의 절 배치가 확인된다고 한다.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금당을 두는 고구려식 가람 양식. 이는 고구려 멸망 후 약 400여 년이 지난 고려 시대까지 고구려 사찰 양식이 이 지역에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금마(익산)에 세워졌던 고구려 유민들의 국가인 보덕국(674~684)이 통일신라 신문왕 대에 해체되면서 유민들이 남원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왕산악과 거문고의 음악적 전통이 천 년을 이어왔고, 남원이 오늘날 '국악의 성지'로 자리 잡는 기틀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도 고구려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골짜기를 뜻하는 고구려계 언어로 볼 수 있는 순우리말 '실'은 강원도 한계령이나 경상도 주실마을처럼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남원 지역에서는 호두산 아래 범실(호곡)을 비롯해 한실(대곡), 잣실(성곡), 가실(가곡) 등 다수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세 번의 설법을 형상화한 '1탑 3금당'

만복사지는 '1탑 3금당' 가람 배치였다고 한다. 이 사찰의 이러한 양식은 미륵 신앙의 핵심인 '용화삼회(龍華三會)' 사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미륵불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 뒤 세 번의 설법을 펼치는데, 연구자들은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배치된 세 개의 금당이 바로 이 세 번의 설법 공간을 상징한다고 분석한다.
 남원 만복사지 마애여래입상
ⓒ 이완우
만복사지 마애여래입상. 불꽃 무늬와 화불(化佛)이 새겨진 정교한 광배가 화려하다. 하단에는 생동감 넘치는 큼직한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연화대좌가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우아한 미감과 당당한 기상이 함께 갖추어져 11세기 남원 지역 호족 세력의 자신감 넘치는 위상을 잘 대변해 준다. 이 불상은 뒷면에 약사여래로 추정되는 불상이 얕은 부조로 새겨진 '양면불' 형식으로 본다. 전면의 화려함과 후면의 은은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원 만복사지 마애여래입상 연화대
ⓒ 이완우
 남원 만복사지 마애여래입상 후면의 마애아미타여래 상부
ⓒ 이완우
고려 시대 남원 지리산권은 미륵 신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으로, 당시 조성된 많은 여래상들을 민간에서는 미륵불로 수용하였다고 평가된다. 남원 지역 백성들에게 "덕을 쌓아 복을 짓는다"는 '적덕작복(積德作福)'은 미륵 신앙의 실천 윤리였을 것이다. 덕(德)은 복을 받기 위한 씨앗이라면, 복(福)은 장차 미륵이 가져올 구원의 열매가 된다.

지리산 만복대. 교룡산의 복덕봉 밀덕봉. 복음봉. 요천 건너 덕음산. 요천의 끝자락 문덕봉. 만복사가 보이는 곳 지명에 '복'과 '덕'이 밀집하여 나타난다. 또한 축천과 요천에 조성된 무쇠소와 바위소는 쌓은 덕이 흩어지지 않고 복으로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풍수적 염원의 산물로 이해된다.

남원문화원의 조사(2015년 기준)에 따르면, 남원 지역에는 약 35개소에 걸쳐 47구의 상당히 많은 석불이 분포하고 있다. 마을 입구나 옛 절터에 야외 노출된 형태로 남아 있는 비지정 석불입상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보고가 있다.
 (좌) 남원 주생면 지당리 석불입상 (우) 남원 덕음산 숲바람 길 석불입상
ⓒ 이완우
남원 만복사가 복원된다면

거대한 사찰 만복사가 폐허로 남겨진 지 400년이 넘었다. 만약 만복사가 복원된다면, 사라진 건축물의 물리적 재현을 넘어 잊힌 역사의 숨결을 되살리고 우리 민족의 정서적 원형을 회복하는 숭고한 여정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국여지승람(1486년) 불우(佛宇, 불당) 만복사 조(條)에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동불(銅佛)이 있는데, 고려 시대 11세기에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남원 고을 읍지인 용성지(1752년)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종각, 천불전, 나한전, 명부전 등의 몇몇 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었다.

만복사에서 축천을 건너 1.5km 걸으면 광한루에 이른다. 조선 초기의 만복사는 김시습이 쓴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였다. 양생과 죽은 여인의 혼령이 나눈 영원한 사랑 이야기는 남원 광한루를 배경으로 한 춘향전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김시습도 가까운 거리의 만복사와 광한루를 몇 번이나 오갔을지 모른다.
 숲속 그늘 속의 연분홍 진달래
ⓒ 이완우
 숲속 햇볕 속의 연분홍 진달래
ⓒ 이완우
기자는 만복사지에서 복음봉, 기린산을 거쳐 교룡산까지 이어진 등산로와 산책로의 일부를 찾아서 걸었다. 이곳은 일상 속에서 자연과 역사를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장소였다. 봄날 숲속에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 진달래 꽃잎은 완전한 봄의 환희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를 향한 기다림의 색이었다.

고구려 유민의 숨결이나 미륵을 향하는 민초의 마음, 그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기억을 다시 세울 차례다. 이 기다림과 기억이 남원 만복사를 찾는 여행의 출발점이자, 돌아갈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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