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퓰리처 수상 기자 "사명감 강한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임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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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상훈 뉴욕타임스 서울지국장이 취재원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그는 30여 년간 한국 사회와 한반도 문제를 해외 독자들에게 전해왔다. |
| ⓒ 최상훈 |
인터뷰는 오래 이어졌다. 그의 말은 느렸지만 묵직했다.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이 없었고, 직업과 자신에 대한 착각도 없었다. 1991년부터 한국을 취재해 온 그의 이야기는, 기자란 무엇인가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결정을 못 해서 기자가 됐습니다"
어떻게 기자가 됐느냐고 묻자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젊을 때부터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에요. 대학 졸업하고 통번역대학원을 갔는데, 통·번역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미래에 대한 결정을 못 해서 시간을 버는 것 비슷하게 갔었죠. 대학원을 마칠 때도 뭘 해야 할지 결정을 못 했고요."
카투사 복무를 마친 뒤 코리아헤럴드 시험을 봤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30년 넘게 이어졌다. "저는 항상 좀 그런 것 같아요. 결정을 못 해서 흘러온 거죠"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1년이다. 광주가 있었고, 전두환이 있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지금 공부할 때가 아니다"라는 외침에 학생들이 뛰쳐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영남대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데모가 매우 많았어요. 제가 주도해서 한 적은 없고 약간 구경에 가까운 참여 정도였어요. 하지만 80년대 대학 다닌 사람들은 꼭 운동권처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은 다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내 놓고 보면 그 시절 분위기 자체가 사회 약자, 불공정, 사회 정의 같은 걸 생각하게 했죠."
우연히 기자가 된 사람과 처음부터 기자를 꿈꾼 사람은 실제 취재에서 다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저는 엄청난 사명의식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사고 치는 사람들 보면 굉장히 진지하고 사명 의식 강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히틀러가 대표적인 경우고요. 그래서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너무 강조하는 말을 들으면 저는 약간 부담스럽습니다."
그렇다면 기자는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할까. 그가 그리는 기자의 모습은 정의를 외치는 투사보다, 사실을 다루는 숙련공에 가까웠다.
"직업이니까 직업 윤리가 있는 거죠. 좋은 기사라는 결과물이 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느냐, 그런 건 누구나 아는 거잖아요. 기자라면 거기에 맞춰 잘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꼭 무슨 대단한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코리아헤럴드·AP·뉴욕타임스… 다른 것은 조직보다 독자
최상훈은 한국의 영자지 코리아헤럴드, 미국 AP통신, 뉴욕타임스를 거쳤다. 세 조직의 차이를 묻자 "조직 문화보다 독자층이 더 중요하다"라고 했다.
"코리아헤럴드는 한국 뉴스를 영어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주요 독자층이고, AP는 전 세계 언론사가 받아쓸 수 있게 써야 하죠. 어느 나라 사람이 읽어도 이해되게요. 뉴욕타임스는 미국 독자에게 이 사건의 의미와 맥락까지 설명해야 하고요."
가장 큰 차이는 결국 독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어떤 기사를 얼마나 자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룰지 모두 그 기준 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기사 구조와 문체도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통신사가 빠르고 간결하게 사실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면, 뉴욕타임스는 더 분석적이에요. 독자에게 설명하고, 이 기사가 갖는 의미가 뭔지를 더 강조하죠."
다만 그는 최근의 변화도 짚었다. 뉴욕타임스가 거의 온라인 언론사가 되다 보니 통신사와의 독자층 경계가 예전보다 많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종이신문 시절과 달리 물리적 한계가 없어진 탓이다.
그는 스탠퍼드대 한국학 연구원으로 있던 1년 남짓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영어로 기사 쓰는 일의 어려움을 묻자 고개를 저었다.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글쓰기의 문제예요. 한국어로도 글 쓰는 건 어렵잖아요. 결국 내가 그 주제를 얼마나 이해했느냐의 문제죠."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저는 이상하게 한국 사람이면서도 영어로만 계속 일해왔기 때문에 글 쓰는 건 영어가 더 편해요. 말하는 건 한국말이 편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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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전경.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의 현장으로, AP통신 보도로 세계에 알려졌다. 쌍굴의 좌우 벽에 탄환이 아직 박힌 곳은 세모(△) 흔적만 남은 곳은 동그라미(○) 명확하지 않은 곳은 네모(□)로 표시돼 있다. |
| ⓒ 임미리 |
최 기자가 노근리 취재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보도까지 5년이 걸렸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 기사들이 어디서 끝났는지부터 말했다. 당시까지 노근리에 관한 보도는 사실상 책 한 권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해자 가족이 쓴 자전적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쓴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기사들을 보면 최소한 미 대사관이라든지 미군 측에 물어보기라도 해야 했는데 안 했더라고요. 한국에서 이런 엄청난 주장이 나오는데, '너희 의견을 내놔 봐라'라는 것도 안 한 거예요."
그래서 그는 미군 측에 공식 문의를 했고, 주민들이 과거에 청원서를 냈을 때 미군이 보낸 답장들을 입수했다. 그 답장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취재는 세 갈래로 진행됐다. 한국 쪽 주민 증언과 자료, 미국 측 군 문서 발굴, 그리고 퇴역 군인 추적이었다. 이메일도 드물던 시절이라 DHL로 자료를 주고 받으며 미국의 동료 기자들과 교차 확인했다. 미국 측에서는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문건도 많았고, 전쟁 중에 소실된 것도 적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증언도 쉽게 믿지 않았다.
"하늘에서 모든 걸 본 사람은 없잖아요. 피해자도 자기 위치에서 본 것만 알고, 군인도 자기 위치에서 본 것만 알아요. 많이 만나서 모자이크처럼 그림을 맞춰야 했죠. 일어난 지 거의 50년이 지난 시기였으니까 기억의 한계도 많이 생각해야 했고요."
문서와 증언 사이, 기자는 무엇을 믿는가
결정적인 문서는 끝내 찾지 못했다.
"핵심 질문 중 하나는, 그 시점, 그 장소에서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라는 상부 명령이 있었느냐는 거였죠. 그런 명령을 들었다는 구두 진술은 있었어요. 그런데 문서가 있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건 결국 못 찾았습니다."
다만 당시 미군이 한국 전선 전반에 걸쳐 피난민 행렬에 총격을 허용한다는 문건들은 여럿 발견됐다.
"당시 미군이 패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피난민 행렬 속에 적군이 섞여 있을까 봐 두려움이 컸어요. 그래서 공군, 육군 막론하고 피난민 행렬에 총격을 허용하는 문서가 꽤 많았습니다. 사실 그런 문건이 노근리 조사를 하면서 최초로 많이 발견됐어요."
나중에 한국 국방부와 미군이 공동 조사를 벌이고, 더 많은 관련 문건들이 발굴되는 계기가 된 것도 그 보도였다.
문서와 증언이 충돌하면 무엇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순한 답을 거부했다.
"문서라고 다 진실은 아니죠. 거짓말로 남긴 문서일 수도 있고, 기억도 완벽하지 않고요. 문건이 없다고 해서 공격 명령을 받았다는 군인 진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어요. 결국 서로 견주고 가치 판단, 중요성 판단을 해야죠."
그에게 특종은 번뜩임보다 오래 듣고 오래 의심하는 노동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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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미얀마 양곤에서 군정에 항의하며 행진하는 승려들. 이른바 ‘샤프란 혁명’으로 불린 민주화 시위 장면이다. |
| ⓒ Racoles/Wikimedia Commons |
2007년 미얀마 군정 시절, 승려들의 반정부 시위와 군부 탄압이 국제 사회 관심을 모았지만 외신 기자들은 입국조차 쉽지 않았다. 당시 동남아 담당 기자들도 비자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관광비자만 나왔다.
"본사에서 아시아 기자들에게 다 한번 신청해보라고 했어요. 저도 냈는데 제 것만 덜컥 나온 거죠."
이유는 의외였다. 한국 불교계와 미얀마 불교계의 교류가 활발했고, 한국 스님들이 이용하던 비자 대행 창구를 통해 신청서가 들어간 덕분이었다.
현지에선 인연이 길을 열었다. 공항 가는 버스 안에서 미얀마에서 공장을 하던 고교 친구의 지인이 떠올랐다. 그는 미얀마가 제재를 받으면서 공장이 망할 때도 현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고 손해를 감수하며 나온 사람이었다. 현지인들이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그의 소개로 현지 조력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도망 다니는 반체제 인사를 몰래 만나 인터뷰할 수 있었다. 택시를 여러 번 갈아타며 찾아간 그 인사는, 서방 언론과 인터뷰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
태풍 나르기스 때는 군인들이 피해 지역 진입을 막고 있었다. 기자들이 많이 몰려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스님들의 구호 트럭에 동승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영어로 부탁하자 스님이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표정이 달라졌다. 젊을 때 서울 조계사에 연수를 왔던 스님이었다. 그 스님이 "내일 새벽 6시에 여기 와 있어라"라고 해서 혼자 들어가 취재했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뭐 중뿔나게 잘한 건 없고, 운이 좋았던 거죠."
기자를 버티게 하는 건 '틀릴 수 있다는 감각'
오랜 시간 기자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재능만으로 오래 하긴 어렵죠. 꾸준함, 성실함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연히 기자가 됐다는 사람. 그러나 그 우연을 30년 넘게 버틴 사람. 최상훈 기자를 오래 움직인 것은 거창한 사명이 아니었다. 오래 쌓은 관계, 오래 의심하는 습관 그리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2편에서는 7명의 대통령 시대를 지켜본 외신 기자가 본 한국 정치의 변화, 세월호 이후의 언론 불신, 북한과 K-팝을 통해 본 한국 그리고 그가 끝내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터뷰②] "보수라 욕하든 진보라 욕하든, 이야기가 좋으면 거기에 충성한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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