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맛도 아름답죠”… 마우스로 움직이는 도형들의 춤

‘픽토그램 작가’로 통하는 홍승혜(67·전 서울과기대 교수)씨 개인전이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 24일 개막했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먼저 맞는 작품은 특유의 픽토그램 그림이 아니었다. 대신 ‘움직이다’는 뜻의 영어 동사 ‘무브(move)’를 구성하는 알파벳 소문자가 이리저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영상이 손님을 맞았다. 원래 철자에 ‘o’ 하나를 더 뒀을 뿐인데 ‘o’자 두 개가 인간의 눈처럼 의인화돼 소녀가 가볍게 춤을 추는 인상을 줬다.
이 작품 ‘움직이세요’를 초입에 내세운 이번 전시 제목은 ‘이동 중(on the move)’이다. 움직임을 화두로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는 전시 성격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 인생 초기의 픽토그램 작업에서 현재의 움직이는(무빙) 이미지로, 입체 작품으로, 심지어 가구 형태 작업으로까지 쉬지 않고 나아가는 작가의 예술 정신을 비유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노래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움직인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무엇보다 유기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작가 노트 중에서)
옛 고려제강 공장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자리 잡은 국제갤러리 부산점은 서울 본점에 비해 장소가 협소하다. 전시가 자칫 밋밋해질 위험성이 있다. 이번엔 중간에 가벽을 세워 마주 보게 하고 영상 작업을 거기에 설치함으로써 디스플레이에서도 공간의 한계를 춤추듯 가뿐히 넘었다. 움직임을 주제로 초기작에서 근작까지, 평면에서 입체까지 작업 세계의 변천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점도 이번 전시의 매력이다.

작품 주제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표현한 대상이 정지돼 있음에도 움직인다는 느낌을 주는 픽셀 회화다. 픽셀 회화는 1997년 컴퓨터 윈도 이전 도스(DOS) 체제에서 탄생했다. 레고 블록 쌓기처럼 픽셀 한 칸 한 칸이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방식의 컴퓨터 이미지 단위인 픽셀은 특유의 픽토그램 이미지로 이어졌다. 움직임에 대한 근본적인 갈구 때문일까. 작가는 픽토그램도 움직이고 싶어 했다. ‘가족’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면 남자와 여자, 아이를 시각화한 픽토그램 이미지들은 머리 부분만 반복시켰는데도 이미지들이 뛰어가는 효과가 난다.

두 번째는 대상이 움직이는 영상이다. 작가는 수직 수평으로만 움직이는 픽셀 단위에 더는 갇히지 않고 별, 사선, 동그라미, 십자 표시 등 다양한 도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영상 시대를 열었다. 자유로운 곡선과 비정형의 형태로 만든 무빙 이미지는 마침내 표정까지 갖게 된다. 전시장 한 가운데 설치된 작품 ‘표정 연습’이 그 예다. 노란 바탕에 검은 선으로 된 원과 반원, 사선, 십자 표시 등의 도형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결과, 웃고 찡그리고 때로는 우는 표정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관객이 움직이는 주체가 되는 작업들이 나왔다. 올해 신작인 ‘액자형 부조’는 중간에 빈 공간이 있는 액자 형태 판넬 작업이다. 겉면에 갖가지 도형 모양의 구멍을 뚫어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고, 안에는 손으로 꺼낼 수 있는 도형 이미지를 숨겨 놓았다. 작품과 숨바꼭질하는 기분을 준다. 바닥에 놓은 의자 작품은 직접 앉을 수 있다. 통상의 의자보다 5㎝ 낮게 제작됐다는 의자는 마치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의 나라에서 쓰는 의자처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장에 가득 흐르는 것은 인간의 온기다. 기하학적인 픽토그램 회화 시절부터 작품에서 온기가 느껴져 ‘유기적 기하학’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온기가 영상 작업에까지 이어진다. 사람의 감정을 매만지는 온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우선 색상이다. 즐겨 쓰는 노랑과 검정의 대비는 경쾌하고, 빨강 초록 보라 등 원색을 쓸 경우에는 톤을 낮춤으로써 명랑한 기분을 준다. 두 번째는 움직임의 방식이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이미지들이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것과 달리, 홍승혜의 영상 작업에서는 왈츠를 추는 듯 도형들이 인간의 속도로 미끄러진다. 작품마다 작가가 ‘개러지 밴드’ 앱을 통해서 작곡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작가는 “마흔에 포토숍을, 쉰에 개러지 밴드를, 육십에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웠다”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손맛만큼 기계의 맛도 아름답다”고 강조했다.
작업 전반을 요약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제 작업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도형들의 춤입니다. 마우스로 만든 춤이며 저는 안무를 한 것입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부산=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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