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칼럼] 동반성장, 말을 넘어 실질적 행동으로

2026. 4. 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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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서울대 총장·국무총리

자본주의는 역사상 다른 어떤 체제보다 더 큰 번영의 토대를 닦아왔다. 우리나라 또한 그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적 성장의 이면에는 대기업·공공기관·금융권 등 강자와 중소기업·사회적 약자 기업간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는 양극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 갈수록 간극 벌어지는 양극화
역대 정권 말만 앞서고 성과 못 내
대기업, 중소기업에 기회 개방하고
공공부문은 조달시장 개방해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나는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강자와 약자가 함께 공존할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임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 자연의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거대한 나무가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높이 자라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무게를 지탱하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강자가 더 크게 발전하고 국가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경제의 뿌리 역할을 수행하는 중소기업과 사회적 약자 기업이 함께 숨 쉬며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역대 정부는 명칭은 저마다 달랐을지언정 동반성장의 필요성에는 늘 공감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담론과 구호는 무성했지만 실천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른바 ‘말은 많지만 행동은 없는 NATO(No Action, Talk Only)’ 행정이 반복되어 온 셈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 기업을 위한 정책들은 번번이 공직사회의 높은 관료적 벽과 기득권의 저항에 가로막혀 현장까지 닿지 못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공공기관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공공조달 시장의 일부 영역을 보다 합리적으로 개방하는 일이다. 현재 정부는 중소기업의 판로 지원을 위해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제도를 운영하며 대기업의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공공기관과 산하기구들은 제도상의 예외 규정을 교묘히 활용하여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영세·중소 업체들은 공공기관, 그리고 금융권이라는 높은 진입 장벽 앞에서 자립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7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산업부·지식재산처·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행히 변화의 서막은 오르고 있다. 사회적 약자 기업의 생존권 보장과 동반성장 환경 조성을 위한 대통령의 지시가 있은 후, 한국전력이 산하 위탁 업무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한 것은 공공조달 시장의 거대한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이제는 다른 공공기관들도 서로 눈치만 보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 국정 철학에 발맞춘 실질적인 행동에 나설 때다.

그 핵심은 중소기업과 사회적 약자 기업 간의 균형 있는 개방, 즉 기업의 체급에 맞는 ‘시장 분할형 경쟁 체제’의 확립에 있다. 예컨대 일반형 청구서 물량은 중소기업 간의 경쟁으로, 맞춤형 청구서 물량은 사회적 약자 기업 간의 경쟁으로 배분하는 ‘투-트랙(Two-Track)’ 방식이다. 이는 효율성 제고와 안정적 자립 기반 제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상생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저항은 완고하다. 이른바 ‘알짜 물량’으로 불리는 전자소송, 범칙금 고지서 등 대규모 사업들은 여전히 보안과 민감 정보 취급을 명분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을 획득한 민간 기업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보안 역량을 갖고 있다. 경쟁력 있는 민간의 저비용·고효율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정부 예산을 절감하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다. 대통령실은 모든 공공기관에 이와 관련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동반성장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되게 해야 한다.

공공부문에서 시작된 상생의 온기는 금융권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빅5 대형은행들은 단순한 구매 물량을 넘어, 자금 공급과 거래 조건 측면에서 중소기업·사회적 약자 기업에 대한 접근성을 충분히 열어두지 않고 있다. 진정한 개방은 신용공급, 수수료, 결제·정산 관행 전반의 구조적 접근성 확대를 의미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월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한 참석자의 발언이 끝난 뒤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양극화 해소의 가장 큰 열쇠는 강자집단의 핵심인 대기업의 개방에 있다. 대기업의 개방은 납품구조 개선, 기술 협력, 시장진입 기회의 공유로 이어져야 한다. ‘호랑이는 작은 짐승을 잡지 않는다’고 한다. 장애인 고용 의무를 과태료 납부로 때우거나 중증장애인 생산품 구매를 형식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을 넘어, 중소기업과의 거래기회와 성장경로를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진정한 경제 혁신은 기술의 진보뿐 아니라 ‘관계의 진보’에서 시작된다. 강자 집단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회적 약자들과의 동반성장을 위해 과감하게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선순환하는 건강한 경제의 출발점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말(Talk)’에 머무는 동반성장을 넘어, 시장을 열고 기회를 나누는 ‘행동(Action)’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양극화를 넘어서는 길이며, 대한민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유일한 해법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서울대 총장·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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