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봉의 시선] 문화 분야 보은 인사, 해법은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진보는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면 꼭 20년 전에 지금보다 더한 낙하산 인사 파문이 있었다. 2006년에도 문화부 산하 단체 인사가 문제였다. 다른 점은 당시는 미수에 그쳤다는 점. 아리랑TV 부사장과 한국영상자료원장 자리에 청와대가 미는 인사를 앉히기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진룡 당시 문화관광부 차관이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 취임 6개월 만에 경질됐다는 게 파문의 골자다. “배 째달라는 얘기냐”는 청와대 측의 협박성 발언이 있었다는 폭로가 뒤따랐고, 폭로의 진위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이어졌다. 경질·막말로 얼룩진 20년 전이 누아르 같다면, 정동극장 대표 등의 인사를 두고 규탄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요즘은 강도 순한 소동극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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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 서승만 대표와 황교익 원장
문화강국 마중물 역할 할 수 있나
투명한 선발 절차, 미리 시작해야
」

반발한다고 인사 무르는 경우 못 봤으니 버스는 이미 떠났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을 입버릇처럼 되뇌는 판에 낙하산 또는 보은 인사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예 미국의 플럼북(plum book)처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공직 리스트를 작성해 낙하산 인사를 제도화하는 것도 지금 같은 잡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서승만 정동극장 대표와 황교익 문화관광연구원장의 경우 과거 경솔한 처신, 과도한 정치 편향이 크게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요소가 문화기관장 자격·자질 시비로 직결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서승만씨가 페이스북에 공개한 이력을 보면 2000년대 초반부터 연출·감독한 공연·영화가 줄잡아 수십 편이다. “그동안 축적해 온 현장 경험과 홍보 역량” 같은 문화부 보도자료의 수사가 크게 과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다. 문화관광연구원의 경우 적절치 않은 자격 조건의 원장이 과거에는 없었나. 오히려 대통령과 신임 원장 간의 각별한 관계가 기관 활동이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앞으로 이들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주느냐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눈높이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괜찮은 퍼포먼스가 어려운 구조다. 기자의 억측이 아니다. 공연계와 연구원 주변에서 각각 귀동냥을 한 결과가 그렇다.
유서 깊은 정동길의 낭만이 자동 연상되는 정동극장은 마케팅 전문가 홍사종씨가 극장을 이끌던 1995년 개관 직후 장안의 화제였다. IMF에 짓눌리던 시절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1000원짜리 ‘정오의 예술무대’가 큰 인기를 끌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극장장(2019년 ‘대표’로 명칭 변경)이 바뀔 때마다 극장의 방향성이 흔들리며 뭔가 축적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가능성 있는 공연을 선별해 ‘2차 공연기회’를 주는 제작 기능은 척박한 우리 공연 풍토를 생각하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을 겸비한 명품 공연 보급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까지 욕심을 부린다면 크게 미흡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런 마당에 서승만씨 정도의 경력으로, 당대의 연출가·안무가 등과 함께 미학적 고민이 담긴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만들어내 정동극장의 위상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부의 임명 사유는 걱정된다. “국립정동극장의 관광 자원으로서 역할을 강화하고, 우수한 공연을 국내 관객을 넘어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K컬처 300조’도 좋지만, 외국인 관광객까지 노린 코믹 터치 대중물에 최초의 근대 극장 원각사(圓覺社)의 맥을 잇는다는 문화 안방을 내줘야 하나.

문화관광연구원도 마찬가지. 한 현직 연구원은 “누가 원장에 오더라도 굴러는 간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관광연구원이 이제부터라도 경쟁력 있는 문화·관광 콘텐트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에 치중해 문화 강국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면 적절치 않은 인사라고 평했다. 문화부와 협의해 연구 과제를 결정할 때 원장이 지적 혹은 도덕적으로 문화부 관료들을 압도해야 연구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황 원장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낙하산 인사는 왜 되풀이되는 것일까. 막을 방법은 없나. 대통령이 세세히 챙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문화연대 출신 이동연 대통령실 문화체육비서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방지책은 이미 나와 있다. 지난해 5월 문화부가 발표한 국립예술단체장 선발 개편 방안이다. ▶공개검증위원단 운영 ▶단체장 임기 만료 1년 전에 후임자 선임 절차 시작 등이 주 내용이다.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신준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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