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와 전봉준 의형제 맺어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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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멸의 바람길]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2022년 정읍 황토현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불멸-바람길]이다. 정읍시는 지난 2021년 황토현 전적에 있었던 전봉준 장군 동상을(친일 조각가 문제)로 철거했다. 이후 세운 동학농민혁명군상이 바로 사진의 군상이다. 본 사진은 정읍시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사진이다. |
| ⓒ 정읍시 |
여기서 보은 수비대를 격파하고 부대를 둘로 나누어 1대는 영동·옥천으로부터 논산으로 직행하여 전봉준의 농민군과 만나고, 다른 1대는 회덕에 이르러 관군과 싸워 이들을 물리치고 논산에 도착하여 전봉준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논산에 동학농민군의 대본영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났다. 이제 논산의 대본영에서는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손병희가 서로 만나 형제의 의와 생사를 맹세하니, 전봉준은 형이 되고 손병희는 아우가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손병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한갓 일이 중하고 급한 것만을 생각하고 급거히 일을 일으켜 수없는 민재(民財)와 생명을 없애고 형세 이에 이르렀으니 내 한 몸만은 이제라도 선후책을 강구하여 최후의 한 마음으로 공주를 직충하면 십분의 희망이 있으니 돌아보건대 호남인은 여러번 싸운 나머지 피곤하기가 저러하니 원컨대 기호의 도중(道衆)이 동심협력하여 대사를 형성하기 바란다." (김삼웅, <손병희평전>)
손병희는 남접의 대표이고 명실상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과 손을 잡았다. 양측의 협력으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에서 뜻을 함께 모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의(義)를 이루자는 '의형제'였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손병희 양대장이 서로 만나 손을 잡으니 일면에 옛같이 간담이 상조하고 지기(志氣)가 부합되는 지라. 드디어 형제의 의를 맺어 생사고락을 함께 맹세하니 전봉준은 형이고 손병희는 아우가 되었다. 이날로부터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막에서 잠을 자고 기타 모든 일에 동일한 보조를 취해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동학군은 북접의 참여로서 그야말로 100만 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다. 당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 측의 동학군은 관군은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을 뽐내는 일본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조선에 파견한 일본군은 비록 3개 연대의 8,000여 병력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잘 훈련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 조선정부군과 지방의 영병 또는 일본 대륙낭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기껏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한데 비해 일본군은 영국에서 개발되어 수입한 스나이더(snider)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여 임진왜란 때의 무기와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후발식 단발 소총으로서 1874년 일본의 대만 침략 때에도 사용되었던 신형무기였다. 동학혁명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 대 1의 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10월 9일(음력) 삼례집회 이후 10월 12일(음력)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음력) 충청북도 청풍 부근에서 충주지방 경비병이 동학군 수령급 이하 30여 명을 살육하고 소총 2000정과 화약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5일(음력)에는 대구 병참부의 일본군이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앞서 11월 12일 보병 제19대대가 경성에서 출발해서 학살전에 참여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 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스쿠로 미츠마사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학살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정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 측 교도 중대, 그 밖의 일본군 수개중대와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 전투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세한 이래 남접 동학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공주 공방전에서의 패전 후에도 전봉준의 부대와 고락을 같이 하며 후퇴하다가 순창에서 비로소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를 향하여 북상하게 되었다.
이후 진안·장수·무주 등지를 우회하여 충청도의 영동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이 심하여 이곳에서도 지탱하지 못하고 청주 화양동을 거쳐 충주에 이르자 또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아 12월 24일을 기하여 잔여 부대를 해산하고 교주 해월 이하 손병희·손천민·김연국 등의 동학지도부는 각기 개별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천도교창건사> 제2편)
손병희가 지휘하는 동학군은 여러 차례 전봉준이 이끈 부대와 합동으로 전투하여 패하기도 하고 승리도 거두었다. 11월 25일 원평전투에서 패하고 태인으로 퇴각하여 머물다가 추격하는 관군에 패하였다. 동학군 2만 군사가 500명으로 줄어들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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