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에게 진 일본 탁구 대표 반응의 소중함
[이승환 기자]
일본의 한 탁구 경기장에서 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탁구대 한 쪽에는 땀을 흘리며 라켓을 쥔 프로 선수가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차갑고 조용한 로봇 팔이 라켓을 들고 있었다. 서브가 시작됐다. 공이 오갔다. 그리고 결과는 로봇의 승리였다.
이 로봇의 이름은 '에이스(Ace)'. 소니 AI와 브라질 항공기술연구소가 함께 만든 자율 탁구 로봇으로, 국제학술지 <네이처> 표지를 장식할 만큼 과학계에서도 경이로운 성과로 인정받았다. 에이스는 공식 국제탁구연맹(ITTF) 규칙 아래 치른 진짜 경기에서, 10년 이상 탁구를 갈고닦은 엘리트 선수 5명 중 3명을 이겼고, 이후 업그레이드 된 버전은 프로 선수까지 꺾었다.
AI가 바둑에서 인간을 이긴 순간이 2016년이었다면, 이제는 AI가 '몸을 쓰는 스포츠'에서도 인간을 넘어선 것이다.
0.02초의 세계, 인간의 눈은 너무 느리다
에이스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반응 속도다. 인간이 날아오는 공을 보고 라켓을 움직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0.23초. 에이스는 0.02초다. 열 배 이상 빠르다. 공이 네트를 아직 넘기도 전에, 에이스는 이미 '어느 방향으로, 어떤 회전을 걸어, 어느 코너를 노릴지' 계획을 세운다. 인간 선수는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 순간 결정하지만, 에이스는 이미 결정을 마치고 실행만 기다리는 상태다.
탁구대를 둘러싼 9대의 고속 카메라가 활용된다. 이 카메라들이 공의 위치, 속도, 스핀(회전)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8개의 관절로 이뤄진 로봇 팔이 정밀하게 라켓을 휘두른다. 구조적으로는 자동차 공장에서 차체를 용접하는 산업용 로봇 팔과 비슷하다. 다만 그 끝에 용접 토치 대신 탁구 라켓이 달려 있을 뿐이다.
지치지 않는 로봇 선수
에이스가 인간을 이긴 이유는 단순히 반응 속도 때문만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 선수는 경기가 길어질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심리적 압박이 쌓이며,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한 두 번의 실수가 연쇄 실수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에이스는 첫 번째 랠리와 마지막 랠리를 동일한 정확도로 수행한다. 피로도 긴장도 없다.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에이스의 코너 공략 능력이다. 탁구에서 테이블 가장자리 끝에 아슬아슬하게 공을 떨어뜨리는 샷은 인간에게 '고위험 고수익' 선택이다. 잘못 치면 아웃이 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는 안전한 코스를 택한다. 그런데 에이스는 이 위험한 코스를 높은 확률로 반복해서 성공시킨다. 확률적으로 득이 된다고 계산되는 순간, 주저 없이 실행한다.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흥미로운 반전이 하나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일본 탁구 국가대표 출신인 나카무라 긴지로는, 에이스의 경기를 직접 보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샷인데, 로봇이 해내는 걸 보니 인간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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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구 로봇의 특징 |
| ⓒ 이승환 |
① 피지컬 AI,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미 시작된 경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AI를 떠올릴 때 챗봇이나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그러나 에이스는 전혀 다른 AI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으로 보고, 계산하고, 팔을 움직이는 몸을 가진 AI다. 이것을 '피지컬 AI(Physical AI)'라 부른다.
피지컬 AI는 지금 스포츠에서 처음 그 실력을 증명했지만, 그 기술의 본 무대는 공장, 물류 창고, 병원, 건설 현장이다. 엘리트 선수를 이길 수 있는 정밀도와 속도라면,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약을 분류하고, 수술 보조기구를 다루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탁구 로봇의 승리는 스포츠 뉴스가 아니라, 산업 자동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신호이다.
② 진짜 경쟁력은 로봇 팔 + '시뮬레이션 인프라'
에이스를 에이스답게 만든 것은 정교한 로봇 팔 만은 아니다. 핵심은 수천 시간에 달하는 시뮬레이션 훈련이다. 가상 공간에서 수백만 번 랠리를 반복하며 최적의 전략을 학습한 뒤, 현실 경기에 그 능력을 그대로 꺼내 쓴다. 마치 가상현실 훈련소에서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뒤 실전에 투입되는 것과 같다.
이 패턴은 탁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조, 물류, 국방, 의료, 어디서든 같은 방식이 작동한다. 결국 누가 더 정교한 시뮬레이션 환경을 갖추고, 더 많은 시간 동안 AI를 훈련시킬 수 있느냐가 미래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된다. '시뮬레이션-로봇 통합 플랫폼'을 누가 선점하느냐가 다음 시대의 패권을 결정할 것이다.
③ 스포츠 코치와 트레이너의 역할이 달라진다
탁구에서 시작됐지만, 로봇 스파링 파트너는 테니스, 배드민턴, 펜싱, 격투기로 빠르게 번져나갈 것이다. 필요한 수준과 스타일의 상대를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코치와 트레이너의 역할이 바뀐다. '잘 치는 사람'이 코치가 되던 시대에서, '로봇 데이터를 분석하고 선수의 심리를 관리하며 전략을 설계하는 사람'이 코치가 되는 시대로 이동한다. 기술을 가르치는 역할의 일부는 로봇에게 넘어가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멘탈을 관리하는 역할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스포츠 현장만이 아니라, 교육과 직업 훈련 전반에 같은 변화가 올 것이다.
④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스포츠 규정, 교육 제도, 의료 행위 지침 등 피지컬 AI가 침투하는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규칙을 미리 설계하지 않으면, 나중에 뒤늦게 수습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준비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
⑤ 로봇이 이겼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의미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이다. 로봇이 자신을 이기는 장면을 보았을 때,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나는 이제 쓸모 없어졌다"는 패배감, 혹은 "저게 가능하다면 나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도전 의식. 어떤 반응이 나오느냐는 로봇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교육하느냐의 문제다.
나카무라 긴지로의 반응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이스를 보고 '두려움'이 아닌 '영감'을 받은 것이다. AI와 로봇을 '인간의 대체자'가 아니라 '인간 가능성의 확장기'로 프레임을 잡는 일, 이것이 기술 개발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다. 사회가 피지컬 AI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알파고가 바둑에서 인간을 이겼을 때 세상이 AI를 다시 봤듯이, 에이스의 승리는 우리가 '몸을 가진 AI'를 다시 봐야 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손에 잡히고, 탁구공을 치고, 실제 세계에서 작동하는 지능, 피지컬 AI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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