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와 닮은꼴, 청각장애 사진사가 기록한 대만의 비극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만 지우펀 임씨 가문, '임아록'이 가장인 대가족에 새 식구가 태어난다. 출산에 관심이 쏠려 아무도 듣지 않지만, 라디오에선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나오는 중이다. 1945년 8월 15일, 51년간 식민 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 가운데 앞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대만을 수복한 대륙의 국민당 정부는 부패한 데다 강압적 통치로 일관해 희망은 곧 좌절로 변한다. 각지에서 분란이 발생하고 임씨 가족도 여기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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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스틸 |
| ⓒ ㈜에이썸 픽쳐스 |
미우나 고우나 일제 치하가 익숙한 본성인 앞에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행세하며 돌아온 국민당 정부는 대륙인('외성인') 위주 통치를 펼치며 주요 관직과 이권이 모두 외지인 손아귀에 들어간다. 대만 출신 지식인들은 밀려나고, 현지 실정에 무지한 데다 전쟁비용에 쪼들린 당국이 전매제도를 강화하며 경제가 무너져 민생은 고통을 겪는다. 대만인들의 불만은 끓어오르고 각지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임씨 가문 우환도 그 연장이다.
임씨 집안도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형제 중 가장 똑똑하고 촉망받던 둘째는 생사조차 알 수 없고, 셋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폐인이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참전 경력 탓에 '매국노'로 밀고를 당해 고문을 당한다. 실제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을 했다기보단, 이권을 빼앗기 위해 정적을 숙청하는 음모가 횡행해 벌어진 일이다. 장남은 수습에 골치가 아프다. 가장 아록은 비록 소싯적 건달이긴 했어도 일본에 맞서 마을을 지켰다며 어처구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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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스틸 |
| ⓒ ㈜에이썸 픽쳐스 |
대만이 겪은 운명은 한국 현대사 국가폭력과 닮은 꼴이다. 이미 역사학계에선 꾸준히 교차 연구가 진행되는 주제다. 현지 사정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않은 채 편견과 적개심으로 가득한 외지 세력이 정복자로 군림하며 폭정을 일삼아 내전이 벌어진 점에선 제주 4.3 사건과 비교할 만하다. 공정한 정치와 민주적 참여를 요구했으나 본보기로 삼고자 학살을 자행한 점에선 5.18 민주화운동에 비견할 만하다. 군정의 무능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민중 폭동이란 점에선 대구 10월 항쟁과도 연결될 수 있다.
임씨 가문 두 아들은 각기 다른 연고로 시국에 휘말린다. 본토와 쌀이나 설탕을 교역하는 무역에 종사하던 첫째는 국민당과 함께 들어온 본토 범죄조직의 표적이 된다. 이권을 빼앗기 위함이다. 문웅은 필사적으로 맞서지만, 격변 속에서 역부족이다. 막내 문청은 장애인이긴 해도 친구 '관영'과 함께 시국을 논하며 독서를 게을리 않는 지식 청년이다. 지식인 집단과 교분을 쌓는 바람에 그들이 탄압당할 때 덤터기를 쓴다. 굴종하지 않는 자, 잡혀간다.
마침내 갈등이 폭발하며 1946년, 훗날 '2.28 사건'으로 불리는 대만 현대사 최대 비극이 터진다. 경찰과 단속원의 과잉 단속에 생계를 위해 노점을 연 과부가 폭행당하고 항의하던 학생이 총격에 사망한 것. 이를 계기로 행정중심지 대북(타이페이)에서부터 전역으로 공권력 대 민중, 외성인 대 본성인 간 폭력사태가 불처럼 번진다. 한 번 발화한 광풍은 꺼질 줄 모른다. 당황한 당국은 현지 지식인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 활동을 인정한다. 일단 유혈사태를 막으려는 노력에 문청의 지인들도 참여하지만, 실은 시간 벌이 술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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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스틸 |
| ⓒ ㈜에이썸 픽쳐스 |
그 와중에 애꿎은 희생자가 속출한다. 문청도 본성인 폭도의 검문 과정에서 대만어/일본어를 말하지 못해 즉결처형될 뻔한 걸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국민당 정부군의 살상이 절대다수였다지만, 폭력과 증오의 전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와 더불어 대만 현지 이권을 노린 대륙 출신 범죄조직의 정경유착,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하는 밀고가 난무하며 청각장애인마저 매국노로 잡혀가는 블랙코미디가 집단광기를 소름 돋게 묘사한다.
참혹한 진압은 현재까지 정확한 피해 규모도 추산하기 힘든 참극으로 종결된다. 현지 지식인을 말살하며 대만의 지배권을 확립한 국민당 정부는 이후에도 본토인 위주 지배를 확립하고 대만어 사용을 금지한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이 '국부천대'를 통해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면서 대만 내 차별이 고착화된다. 본토 수복을 내걸고 대만을 근거지로 확보하려던 국민당 정부는 무려 1987년까지 계엄령 체제를 유지한다. 2.28 사건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진상규명 활동은 당연히 탄압받았다. 우리 현대사 풍경과 너무나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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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스틸 |
| ⓒ ㈜에이썸 픽쳐스 |
영화는 대만 현대사에서 금기시되던 국가폭력의 참상을, 한 가족의 수난사를 통해 압축하는 데 성공한다. 1987년에 들어서야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고립되자) 국내 통합을 목적으로 계엄령이 해제된 지 고작 2년 후 공개된 영화는 현대사 재조명에 일대 전기로 작용한다. 학살자의 후예 국민당은 부패 관료와 현지 사정에 어두운 행정당국의 우발적 사고로 축소할지언정 사과를 단행했고, 양대 정당으로 올라선 민주진보당(민진당) 도약에 2.28 사건의 상처는 결정적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평화공원이 세워지고 기념일로 지정되는 격세지감 변화가 일어났다.
외성인 중심인 국민당이 본토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대륙과 통합을 추구하는 반면, 민진당과 진보 야당은 독립을 긍정한다. 2.28 사건의 해석은 과거사 연구에 그치지 않고 21세기 대만의 미래와 연결된다. 독립을 외치는 진영은 중국공산당이나 대만 국민당이나 똑같이 외성인, 즉 외세로 규정하며 대만의 자주독립만이 해법이라 믿는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런 목소리는 점점 세를 얻고 대만어 사용 운동도 지지를 확보하는 중이다. 대만 통합이 목표인 중국 정부는 앙숙 국민당과 가까워지며 독립운동을 경계한다. 오늘날 양안 분쟁의 결정적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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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스틸 |
| ⓒ ㈜에이썸 픽쳐스 |
두 거장은 근래 국내 창작자에게 벤치마킹 대상이다. 하지만 정적인 촬영과 관조하는 카메라, 더없이 섬세한 미장센 이면에 숨은 세계관, 창작 환경에 관한 고찰 없이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 따라 해서는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 계엄령 치하에서 초창기 작품 활동을 수행하던 그들이 은유와 암시로 구현하는 미학의 형성 과정을 똑바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양조위가 열연한 넷째 '문청'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고통받는 예언자처럼 야만의 시대 끝없는 운명의 장난을 묵묵히 견딘다. 어차피 진실을 보고 듣더라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혹한의 겨울을 보내야 했던 민초를 상징한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 즉 시대의 기록자인 것. 비록 지금은 저항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진실은 은폐할 수 없다는 역사 법칙을 형상화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힘의 논리에 맞서는 생생한 증거 그 자체다.
과거 처연하지만 장엄했던 민중의 의지를 올바로 서술하기 위한 최선은 무엇인가 숙고하고, 공안 탄압 망령이 여전한 가운데 완성한 <비정성시>는 대만 영화의 새로운 물결이 되었고, 감독의 대표작이자 세계 영화 역사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제 온전한 형태로 37년 만에 도착한 전설의 걸작을 너무나 닮은 역사의 상처를 간직한 한국 관객은 어떻게 수용할까?
<작품정보>
비정성시
悲情城市 (A City of Sadness)
1989|대만|드라마
2026.05.06. 개봉|158분|15세 관람가
감독 허우 샤오시엔
출연 양조위, 진송용, 신수분 외
수입 ㈜에이썸 픽쳐스
배급 ㈜디스테이션, ㈜에이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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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성시> 포스터 |
| ⓒ ㈜에이썸 픽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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