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시인, 그가 바라본 시간

박향숙 2026. 4. 2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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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준철 시인의 <오래된 아침>을 읽고

[박향숙 기자]

안준철 시인의 신작 시집 제목 <오래된 아침>을 보고 언젠가 읽었던 헬레나 노르베르의 책 <오래된 미래>를 떠올렸다. 매우 역설적인 제목만으로도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과 좋은 표현을 차용하면서 글쓰는 마음이 부자가 되곤 했었다. 안 시인의 신작 시집에서도 같은 감흥이 먼저 흘러나오고, 책방 지기로서 문우들에게 소개하기 바빴다.

3년 전 책방의 행사, '작가와의 만남'에 어떤 분이 오시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지역의 중학교 국어 선생을 하는 지인이 아주 멋진 시인을 소개하겠다며 안 시인을 추천했다. 더불어 연꽃시인이라는 별칭을 들려주었고,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전주 덕진 공원 연못 속 연꽃의 성장과 소멸을 보며 시로 읊은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의 7번째 시집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와 함께 온 안 시인은 강연 전에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도 들려주었다. 연꽃을 포함한 일상의 사물을 바라봄에 지극함과 애씀이 얼마나 필요하고 소중한 가치인지 알게 해주었다. 그 후 안 시인을 통해 3년째 줌(zoom)으로 시를 강독 하는 줌 강독회에 참여하고 있다.

시인의 8번째 시집 <오래된 아침>을 받고 보니 표지에는 슬슬 출렁대는 듯한 연두빛 물결이 가득했다. 내지에 쓰인 시인의 말에서도 연두가 적혀있었다.
 책표지
ⓒ 푸른사상
다시 봄이다. // 오래전, 어머니가 연두인 나를 바라보셨듯이 / 연두의 연두의 연두인 첫 손주 유담이를 / 할머니가 된 아내가 바라보고 있다. // 무얼 더 바랄 것인가? // 다만, 내 가난한 시가 세상의 마을로 / 한 발짝만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시인의 말 전문)

사월의 사방에서 봄 꽃망울들이 우수수 아우성을 지르더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잊지 말라듯, 어느새 연두색 잎들이 나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시인의 눈 속에서 피어난 연두 잎들. 어린 자신과 그를 바라보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무얼 더 바랄 것인가?'라고 고요한 소리를 음미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만은 아닌 듯했다. 이제는 텅 비우려는 무위의 마음이 또 다른 채워짐임을 알고 있는 시인. 그의 시가 세상 사람들에게 한 발짝 아니 반 발짝이라도 나아가길 희망하는 애틋한 소망이 시라는 문학마당에서 늘 주변머리로만 맴도는 내게도 전해옴이 고마울 뿐이다.
오래된 아침

아침 일곱 시 반
밤새 내 투정을 받아주느라 흐트러진
이부자리 가지런히 해놓고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게
읽어댄 책도 제자리에 얌전히 두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내 발로 걸어 나와
아침을 맞으러 갈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중략)

살아온 날을 생각하면
눈 깜짝할 새겠지만
딴은, 이월에서 삼월이 얼마나 멀더냐
헐벗은 가지에서 새 움이 듣고
대화에서 살구꽃까지가 얼마나 멀더냐

어젯밤 운동장을 돌다가 말고
맨발로 서서 본 별빛은
멀고도 먼, 아슬하고도 아슬한
과거의 과거의 과거가 보내온 잉크인 것을
저 우주 끝에서 막 당도한
이 오래된 아침이라니!

시 <오래된 아침>은 오늘 아침 내가 맞은 시간의 거리와 두께를 생각해보게 한다. '연두의 연두의 연두인' 누군가가 '과거의 과거의 과거의' 모습으로 출발했을 텐데, 내게로 오는 내내 그 낡고 오래된 허물을 다 벗어던지고 이 아침에 도착하다니. '다시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더냐? 명심하고 알아들었으면 윙크를 보내라는 신의 계시'처럼 느껴진다.

총 63편의 시가 수록된 이 시집의 주제어를 꼽으라면 '단절시키지 않아도 투명한 시간에 대한 보증과 애정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24시간 제한된 시간 속에서 칼로 무 자르듯 매사에 순서와 등급을 매기는 잣대를 습관적으로 가지고 사는 나에게는 참으로 본받을만한 시간에 대한 배려이다. '연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 <저녁이라는 장르>에서도 자전거를 통해 저녁이라는 시간에게 '장르' 하나를 창조해주었다.

저녁에 자전거를 타는 것은/ 바람의 혼인식에 초대받는 일 //자전거가 만든 바람과 /저녁이 만든 바람이 만나면 /연애가 되는 거지 /풀꽃들이 생기지 //저녁은 하나의 장르다 //다 늦은 오후와 밤 사이 /바람이 안색을 바꾸고 /어둑한 것들이 빛나는 시간 // 어둑한 것과 /어두운 것은 다르지 (하략)

지난해에는 안 시인의 생활 철학 한 가지를 따라했다. 바로 맨발 걷기다. 시인은 건강 상의 이유로 시작해서 맨발걷기의 달인이 됨직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작년 어느 여름날 뒷동산을 산책하다 맨발걷기에 최적화된 황토길을 발견하고, 한 계절 내내 나도 '안 시인 따라쟁이'를 자처했다. 시 <맨발의 사랑>에서 나오는 시어를 읽으며 맨발걷기를 하면서도 넘치는 시적사랑에 감동이 일렁인다.
나를 조금씩 늦추는 것 말고/ 달리 무엇으로/ 고요할 수 있을 것인가 //
맨발로 산을 오르다 보면/ 생면부지인 나와 나의 맨발에게/ 쏟아지는 응원의 말과 눈빛들//
그럴 때마다 햇살보다도 환하게/ 있는 명랑을 다해 화답해주지만/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다정한 것들이 많다// ('맨발의 사랑' 부분 중에서)

안 시인의 장기 중 하나는 사진 촬영인데, 이 또한 무조건 따라 하고 싶은 일이다. 시인의 사진에는 사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이야기가 있음은 마땅하고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오는 만상의 표정들을 단번에 만나볼 수 있다. 언제나 누구를 만나든 지 밝은 미소와 눈빛을 먼저 내보이는 시인이라서 그런지 사진 속에 찍히는 사물들 역시 빛과 미소로 가득하다.

심지어 그의 시 <꽃들의 영정사진>에서 표현하길,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뇨"라는 말에 "꽃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다가 왔노라고" 말하고 싶다는 시인. 시인이 찍는 꽃 사진이 영정으로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을 시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고요한 듯 대범하고 평범한 듯 특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시인의 삶을 존경한다. 더불어 이참에 안 시인처럼 오래된 미래를 예언하는 비법을 한 수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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