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격차에 생존 달렸다, R&D·설비 동시 투자할 때” [이익 500조 ‘반도체 구루’의 고언④]

이영근 2026. 4. 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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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워’ 저자 크리스 밀러


베스트셀러『칩워』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가 지난 24일 중앙일보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크리스 밀러 제공
세계 기술 패권을 쥐려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Chip War)’는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은 중국으로 가는 첨단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고, 중국은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고래들의 싸움 속에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등이 터지기는커녕 인공지능(AI) 메모리 공급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두 회사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이 500조원까지 점쳐지는 가운데, 이 같은 성과를 지속가능한 경쟁력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을 조명한 베스트셀러『칩 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Tufts University) 교수는 지난 24일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고객사들은 메모리 반도체를 최대한 범용화하려 하겠지만, 현재 영향력의 무게추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독보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력과 고객 맞춤 역량을 갖춘 메모리 업체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속도 경쟁인 기술산업에서는 노사 갈등이 격화할 경우 경영진과 노동자 모두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Q : 이번 호황이 너무 강력해 반도체 산업이 더는 사이클 산업이 아니라는 견해도 나온다.
A :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주기적(cyclical)이라고 본다. 호황과 불황은 반복된다. 다만 그 성격은 분명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PC와 스마트폰 등 개인 소비자 수요가 사이클을 주도했지만, 지금은 하이퍼스케일러(초대형 클라우드 사업자)의 데이터센터 투자(CAPEX)가 핵심 변수다. 사이클을 움직이는 동력 자체가 바뀐 것이다. 특히 이번 상승장은 경제 전반의 컴퓨팅 수요가 구조적으로 도약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특히 강하다.

Q : 메모리는 ‘범용’에서 ‘전략 자산’으로 격상됐나.
A : 메모리 기업은 최대한 자사제품을 차별화하려 하고, 고객사는 이를 최대한 범용화하려 한다. 공급망 전반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힘겨루기다. 다만 현재는 독보적인 HBM 기술력과 고객 맞춤형 제작 능력을 갖춘 메모리 업체 쪽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본다.

Q : 종합반도체기업(IDM) 모델과 전문화 모델, 어느 쪽이 유리한가.
A : 지난 몇 년간 IDM 모델의 단점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삼성전자가 HBM 투자에서 상대적으로 늦었던 이유 중 하나도 메모리에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밖에 없으니 더 집중하며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지금처럼 막대한 R&D와 설비투자가 필요한 시점에서는 IDM의 규모와 자금력이 분명한 강점이다. 삼성은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추격의 기회가 있다.

Q : 미·중 갈등 속 한국의 포지셔닝은.
A : HBM 수요의 대부분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의 경우 중국은 이제 해외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라기보다 강력한 경쟁자다. 중국이 자국 기업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가 2024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례총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크리스 밀러 제공


“테크기업서 노사 갈등은 모두가 패자”


밀러 교수는『칩 워』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엔지니어이자 반도체 회사를 운영한 찰스 스포크의 삶을 조명했다. 그는 반도체 생산기지가 미국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싱가포르와 홍콩으로 공장을 옮기는 결정을 내리며 스포크는 “실리콘밸리에서는 노동조합 문제를 겪었지만, 아시아에는 노조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주요 반도체 기업은 무노조 경영을 하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파업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삼성전자 노조는 “18일간 생산이 멈출 경우 30조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밀러 교수는 D램 시장의 암흑기를 헤쳐온 미 마이크론 직원의 발언을 인용해 “메모리 칩은 잔인하고 잔인한 비즈니스”라고 표현했다. 잔인할 만큼 극단적인 경쟁과 속도가 요구되는 메모리 산업에서 터져나온 세계 1위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움직임에 대해 그는 “기업이 혁신의 속도를 잃으면 경영진과 노동자 모두 패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Q : 노사 갈등 속 ‘원팀’ 해법은.
A : 한국의 노사 문화나 규제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노사의 갈등이 기업의 성공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통산업에서는 정해진 파이를 두고 싸우지만, 기술산업에서는 기업이 빠르게 혁신하지 못하면 경영진과 노동자 모두 패자가 된다. 회사가 뒤처지면 결국 모두가 잃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Q : 글로벌 인재 경쟁 속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충분한가.
A : 국적을 막론하고 CEO(최고경영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을 물으면 모두 ‘인재’라고 답한다. 한국·미국·일본·유럽 모두 마찬가지다.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기업들은 보상 뿐 아니라 조직문화도 매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Q : 반도체 기업들은 지금 벌어들인 이익을 어디에 우선 투입해야 하나.
지금은 R&D와 설비 모두에 투자해야 할 때다.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기술에서 격차를 내는 건 생존이 걸린 문제다.

☞『칩 워』저자 크리스 밀러 교수=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로 미·중국 반도체 전쟁 등 기술 지정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경제사학자다. 저서『칩 워』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역사와 구조를 대중적으로 풀어내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례총회, 미국 정부 및 싱크탱크 자문단에 참여하며 반도체 전략과 기술 패권 이슈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학사, 예일대에서 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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