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의 해양 이야기] 사회구조까지 바꾸는 엘니뇨… 올해 후반 지구촌 강타

라니냐와 더불어 식량·기후 큰 영향
내년 지구 기온 크게 상승할 가능성
닥쳐올 ‘섬세한 균형의 변화’ 주시를
한국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연구선 온누리호는 1999년 11월 15일 호놀룰루를 떠나 동태평양 적도 해역으로 향했다. 갈라파고스 제도 서쪽 해역에 이르기까지 따뜻한 열대를 기대했던 항해는 전혀 다른 풍경을 드러냈다. 적도 한가운데 한낮인데도 바다는 서늘했고, 연구원들은 긴팔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12월 7일 새벽, 배가 페루 카야오 항에 닿았을 때 그 낯선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부두 사람들은 두툼한 옷에 털모자까지 눌러쓴 채 찬 기운을 견디고 있었다. 남위 12도, 초여름이어야 할 페루 항구는 계절이 어긋난 풍경이었다. 이 어긋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97~98년 지구를 달궜던 강력한 엘니뇨가 막을 내리자 곧바로 라니냐가 바다의 주도권을 넘겨받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 적도의 바다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호흡으로 스스로 계절을 다시 쓰고 있었다.

엘니뇨와 라니냐는 태평양 적도 해역에서 바다가 대기와 맞물려 상태를 바꾸는 현상이다. 이를 ‘엘니뇨-남방진동’(ENSO, 엔소)이라고 부른다. 평소 무역풍은 따뜻한 해수를 서쪽으로 밀어 서태평양의 수온과 해수면을 높이고, 동태평양에서는 차가운 심층수가 올라와 상대적으로 낮은 수온과 해수면이 유지된다. 그 결과 열대 태평양에는 동서 방향의 수온 차와 해수면 경사가 형성되고, 해면 기압과 대기 순환도 이에 맞물린다. 이 구조가 무너지거나 강화되는 상태가 엘니뇨와 라니냐다. 엘니뇨 시기에는 무역풍이 약해지면서 따뜻한 바닷물이 동쪽으로 퍼져 동서 간 수온 차가 줄어든다. 반대로 라니냐 시기에는 무역풍이 강해지면서 따뜻한 해수는 서쪽에 더 몰리고, 동태평양에서는 용승이 강화돼 차가운 바다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 현상은 대체로 2~7년 간격으로 불규칙하게 반복되며, 매번 다른 강도와 지속 시간을 보인다.
하지만 자연의 리듬은 엔소 하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인도양 쌍극자와 대서양 수십 년 진동 등 모든 대양에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다. 그 출발점은 태양 에너지가 지구에 고르게 들어오지 않는 데 있다. 적도와 극지에 들어오는 열의 양이 서로 다르며, 이러한 차이는 기후 변동을 만들어내는 근본적 배경이 된다. 이 온도 차이를 줄이기 위해 바람과 해류가 움직이고, 여기에 지구 자전이 흐름을 비틀며, 열을 오래 저장하는 바다의 느린 반응이 더해진다. 그 결과 해양과 대기는 서로 얽힌 하나의 ‘진동하는 시스템’을 이룬다. 이처럼 다양한 시공간 크기의 패턴이 겹치며 우리가 체감하는 기후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열대 태평양에서 바람이 바뀌면 심층수의 용승 세기가 달라지고, 바다의 먹이망 구조도 흔들린다. 특히 엘니뇨 시기 페루 연안에서는 깊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영양염 공급이 줄어 플랑크톤이 감소하고, 이는 멸치류 등 상위 어종 감소로 이어져 어획량이 급감한다. 이 현상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자주 나타나 아기 예수를 뜻하는 스페인어 ‘엘니뇨’라는 이름이 붙었고, 반대 현상은 소녀를 의미하는 ‘라니냐’로 불린다. 전문가들은 엔소 상태에 따라 해양 생산성과 먹이망이 재편되면서 주요 경제 어종의 분포와 어획량이 달라지고, 결국 식량 안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바다의 변화가 식탁과 경제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엔소의 영향은 바다에만 머물지 않는다. 엔소는 전 지구 강수와 기온 분포를 바꾸며 어떤 곳에는 폭염과 가뭄을, 다른 곳에는 폭우와 홍수 같은 극한 기상을 가져온다. 최근 2015~16년과 2023~24년 엘니뇨 시기에 전 지구적으로 기록적인 고온과 함께 지역별로 가뭄과 홍수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 영향은 수자원과 농업 생산, 식량 가격과 에너지 수요를 흔들고, 특히 취약지역에서는 소득 불안정과 생계 위협, 더 나아가 질병 증가 같은 건강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엔소는 바다의 변화에서 출발하지만 그 파장이 어업과 날씨를 넘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전반으로 번져 나간다.
이러한 기후의 흐름은 과거 인류 역사에서도 중요한 배경으로 이어져 왔다. 영국 경제사학자 브루스 캠벨은 저서 ‘대전환(The Great Transition)’에서 14세기 중세 말 세계의 대전환을 기후, 질병, 전쟁, 그리고 취약한 경제 구조가 서로 얽힌 결과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엔소를 포함한 기후 변동은 여러 지역의 가뭄과 홍수를 불러오며 농업 생산성에 영향을 주고, 식량 위기와 사회 불안을 키우는 배경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엘니뇨와 연관된 이상 기후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기존 사회 시스템의 취약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엔소와 같은 자연 변동성은 단순한 배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한계에 도달한 사회 구조와 맞물릴 때 사회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바꾸는 촉매로 기능하기도 한다.
최근 우리는 또 하나의 리듬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아직은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2026년 후반 강한 엘니뇨가 나타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여파로 2027년은 전 지구 평균 기온이 크게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역대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엘니뇨 시기에는 해양에 저장된 열이 평소보다 더 많이 대기로 전달돼 이미 진행 중인 온난화 경향 위에 추가적인 상승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후 대응의 시간적 여유를 좁히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바다가 품은 열과 대기가 주고받는 리듬은 앞으로도 폭염, 가뭄, 홍수, 폭풍의 양상을 더 크게 흔들 수 있으며 그 파장은 식량과 에너지, 건강과 경제를 동시에 압박할 수 있다.
앞으로 바다가 다음 계절을 어떻게 다시 써 내려갈지 우리는 지금 그 섬세한 균형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이재학 한국해양한림원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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