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내 안의 괴물

날이 갈수록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잦아진다. “뭐지 그게? 연두색에 매운맛이 나는”, 이쯤에서 나는 와사비를 떠올린다. 그래도 생각이 나니 다행이다. 그 총기 좋던 내 어머니가 “그게 뭐지? 오래 못 사는 거” 하고 물으면 나는 금세 하루살이라 답한다. 그 멋진 이름을 어찌 잊으랴. 다음날 어머니는 또 물으신다. “그 밟으면 꿈틀대는 게 뭐지?” 그러고 보니 그것도 금세 떠오른다. 진짜 별게 다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유명 배우의 이름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그 배우 이름이 뭐더라 하다가 ‘앤서니 홉킨스’가 떠오르는데 하루종일 걸리기도 한다. 왜 와인, 맥주, 갈비, 불고기 이런 건 금세 떠오르는가? 그 밖에도 금세 떠오르는 건 많다. 고독, 향수, 불면증, 희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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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다가
나만 착하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나는 누군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
![[그림 황주리]](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8/joongang/20260428001217233fghk.jpg)
내게 금세 떠오르지 않는 부정적인 말 중 보이스피싱과 가스라이팅이 있다. 스무 살 시절, 가깝던 친구 중 뒤에서 내 욕을 실컷 하고 다니거나 돈을 꿔가 갚지도 않으면서 “너 그거 큰돈 아니다” 하며 야단을 치던 친구를 좋아했던 건 그가 모범생이 아니라서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불량식품이 맛있는 시간, 그게 젊음이 아닐까? 그때는 물론 그게 가스라이팅인지도 몰랐다. 내 안의 쓸쓸하고 울적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그녀는 틈만 나면 생각해주는 척하며 “너는 잘 난 것도 없는데 부모 잘 만나 운 좋은 아이”라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애 말이 다 맞다. 우리는 수업을 빼먹고 담배와 시간을 죽이며 학교 앞 카페에 앉아 허무를 이야기했다. 아니 멜라니 사프카의 노래를 들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허무 그 자체였다. 요즘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누군가의 시처럼,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김경미, ‘다정이 나를’)
요즘 ‘내 안의 괴물’이라는 넷플릭스 시리즈에 홀려서 보는 내내 그 긴장된 순간들에 숨이 멎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내 안의 착함만 생각하며 내 안의 괴물은 외면하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동정심 없음, 무관심 또한 괴물의 속성이기도 하다. 과장하자면 내 이웃, 가족, 친구, 바로 내 안의 괴물들을 생각한다. 가장 민감한 시절 바로 곁에 있었던 내 친구가 바로 내 안의 괴물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괴물과 함께했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면 성장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 곁의 천사들을 알아보기나 했을까? 세상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다. 쓰레기도 누군가에겐 거름이 된다.
나이 들어 ‘그대 안의 붓다’라는 제목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내게 그대 안의 붓다는 그대 안의 하느님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 안의 선함의 연대를 꿈꾼 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그 거짓말을 아예 믿어버리는 자, 그가 바로 괴물이다. 우리는 때로 괴물에게 이끌린다. 그는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데 능한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다 믿는다 해도 거짓은 거짓으로 남는다.
초등학교 시절,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너는 누구냐?”라는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었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 시절 굉장히 유명한 명배우였던 탤런트 김성옥의 기막힌 연기로 간담이 서늘했던 기억이 난다. 부자들과 저명인사들이 함께한 크루즈 여행에서 매일 누군가 죽는다. 이 심각한 사건을 맡은 형사는 의심스러운 범인들이 다 죽은 뒤 자기 혼자 배 안에 남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자신이 형사라고 믿으며 승객들을 쥐잡듯이 취조한 자기 자신이 바로 배 안의 모든 사람을 죽인 범인이라는 걸 깨닫는 마지막 순간이다.
믿는다는 건 강렬한 마약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 바로 옆에 살았던 기억에 관해 수시로 비명 소리와 수상한 연기가 피어올랐는데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한다. 산다는 건 의심한다는 거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릴 적 기억 속 인상적인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를 오랜만에 다시 떠올린다.
“너는 누구냐?”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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