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보수 타락 경고하는 '경종' 또 울릴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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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MBC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8일과 19일 양일간 대구시민 1002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구시장 적합도를 물은 여론조사 결과. |
| ⓒ 대구MBC |
26일 국민의힘 후보로 선출된 추경호 후보를 중심으로 보수표가 결집할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대구 민심은 심상치 않다. 그래서 이 분위기가 6월 4일까지 이어져 대구 유권자들이 보수 정치권에 경종을 울릴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구는 흔히 '보수의 아성'이나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지만, 이따금 이곳에서는 보수를 향한 경종도 울려 퍼졌다. 보수 정치권이 변질되기 직전, 혹은 위험 상황에 처하기 직전에 이곳에서는 경고 신호들이 나왔다.
박정희 집권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이후로 대구가 보수화된 뒤인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선 당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대구시의 유효투표 31만 474표 가운데 71.5%(22만 2084표)를 얻고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는 23.5%(7만 2997표)를 획득했다. 그해 6월 8일 제7대 총선에서는 대구시의 네 의석 중에서 3석이 민주공화당에 돌아가고 1석만 신민당에 돌아갔다.
이처럼 공화당이 우세했던 대구 정치 구도가 1971년에 변화를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치러진 그해 대선과 총선에서는 야당이 약진 혹은 대승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해 4·27 대선에서 박정희는 대구에서 67.0%(25만 9010표), 신민당의 김대중은 32.3%(12만 4872표)를 기록했다. 박정희 표가 여전히 많지만, 신민당 표도 꽤 많이 늘어난 선거였다.
대구 유권자들의 경고
한 달 뒤의 5·25 총선에서는 훨씬 더한 변화가 나타났다. 대구시의 다섯 의석 중에서 4석이 신민당에 돌아갔다. 1석만 민주공화당 몫이 됐다. 이 같은 대구 표심에 힘입어 신민당은 전체 204석의 43.6%인 89석을 차지했다.
공화당이 과반수인 113석을 차지하긴 했지만, 선거 결과는 사실상 야당의 승리로 해석됐다. 정치부 기자들의 대담을 수록한 5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5·25 총선이 4·27 대선에 대한 영남 유권자들의 반성을 반영한다는 평을 담았다. 대담 서두에 이런 발언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봐 이번 선거 결과는 4·27 대통령선거의 연장적 의미도 갖고 있어. 한 측면에서 보면, 호남은 반(反)영남세를 그대로 견지한 반면, 영남은 4·27 몰표에 대한 자성 내지 자기제어를 한 듯 했고, 다른 측면에서는 영남이 4·27 과정에서도 반집권적인 의식이 팽배했으나 지역의식 등 때문에 반표(反票)로 적극화하지 않았으나 총선에선 반표로 노출된 것이겠지."
이 총선에서는 개헌 문제가 주요 쟁점이었다. 선거 당일 보도된 <조선일보>는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김홍일 신민당 당수대리가 "공화당은 지금 '주권적 독재'의 설계 아래 3분의 2석을 확보하려는 온갖 흉계를 다하고 있다"라며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 못하면 헌정의 종말이 올 것이므로 국민들은 어떠한 꾐에도 흔들림 없이 현명한 투표혁명으로 신민당원을 국회에 많이 보내 개발독재를 분쇄토록 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한 일을 보도했다.
대구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것은 박정희의 불순한 개헌 가능성에 대한 대구 유권자들의 경고로 해석됐다. 이 경고에 힘입어 박정희의 개헌 가능성은 일단 봉쇄됐다. 5월 27일 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평했다.
"5·25 총선은 야당세력의 예상 밖의 진출이라는 이변을 낳고 그 막을 내렸다. 4·27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들은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67년 선거 때 27석(46석의 오기)밖에 얻지 못했던 야당에 호헌선인 69석을 넘어 과반수 선에 육박하는 의석을 허용해줌으로써 파격적인 사태를 가져왔다."
대구 유권자들의 경고는 한국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선거를 통해 대구시민들은 박정희가 당시 헌법에 의거해 또 다른 개헌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대구 민심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킨 그는 국회를 대신하는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개헌 절차를 진행했다. 대구 표심이 만든 총선 결과를 무시하고 유신체제를 불법적으로 출범시켰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7년 뒤 비정상적 방법으로 막을 내렸다.
대구 표심은 보수정치의 타락 가능성에 대한 경고였다. 극우체제인 유신체제는 당시의 민주진영뿐 아니라 보수진영에도 위험한 것이었다. 대구 표심은 상식적인 보수정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박 정권은 이 민심에 부응하지 않고 도리어 역행해 유신체제를 띄웠다가 1979년에 몰락했다.
전두환 정권 향해서도 경종
대구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을 향해서도 경종을 울렸다. 1985년 2·12 총선 때 민정당(민주정의당)의 전국 득표율은 35.3%인 데 비해 대구 득표율은 28.3%였다. 이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낮은 민정당 득표율이었다. 이때 대구에서 득표율 1위를 기록한 것은 김대중·김영삼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신민당(29.8%)이었다.
이 선거에서 민정당은 총 276석의 과반수인 148석을 획득했지만, 득표율에서는 신민당(29.3%)을 약간 앞서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전국구(비례대표) 의석의 3분의 2를 지역구 제1당에 몰아주는 기형적 선거제도 덕분이었다.
대구는 서울·부산과 더불어 민정당의 득표율을 떨어트린 3대 선거구였다. 이렇게 확인된 반(反)민정당 민심은 민주화 진영과 야권의 직선제 개헌 투쟁에 힘을 실어줘 2년 뒤 6월항쟁이 일어나는 기반이 됐다.
2016년 4·13 총선 때도 대구는 경종을 울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중 견제를 받았던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대구동구을에서 당선됐고, 민주당의 김부겸 후보가 수성구갑에서 당선됐다. 민주당 출신인 홍의락 후보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북구을에서 당선됐다. 총선에서 확인된 민심은 그해 겨울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보수의 아성이나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는 이처럼 보수의 타락을 경고하거나 보수의 몰락을 예고하는 경종을 이따금 울렸다. 대구 민심이 평소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치러지는 이번 6·4 지방선거에서는 대구 표심이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에이스리서치 조사는 무선 가상번호를 이용한 100% ARS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응답률 5.3%. 한국리서치 조사는 전화면접조사로 응답률 18.4%,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5%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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