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이틀 전 세상 떠난 거장, 망연자실한 감독의 선택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은 현대 무용의 일대 혁신을 불러온 거장 피나 바우쉬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어 영화화를 제안한다. 하지만 피나와 그녀가 지도하는 무용단 부퍼탈 탄츠테아터 앙상블의 강렬한 움직임을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엔 기술력이 부족하다 여긴 감독은 확신이 생길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무용가는 종종 언제 작업에 들어가냐고 질문했으나 계속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며 미룬 셈이다. 그러나 3D 효과 구현이 궤도에 오르자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마침 피나의 무용단은 영화 촬영을 위해 새 공연 준비에 들어간다. 이제 소재에 걸맞은 혁신적 작업이 본격 개시될 때만 기다리던 찰나, 촬영 이틀 전 비보가 날아든다. 암 진단을 받은 피나 바우쉬가 별세했다는 소식. 망연자실한 감독은 제작을 중단하지만, 공연은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고, 피나의 동료들도 추모와 헌사의 의미로 촬영을 제안한다. 그 결과 피나 바우쉬는 사실상 등장하지 않는 전기영화가 탄생한다. 거대하고 장엄한 제의의 형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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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나> 스틸 |
| ⓒ ㈜에무필름즈 |
고전 발레가 소수의 고급 취향으로 머물고, 현대 무용 역시 대중과 유리될 위험에서 피나의 도전은 간격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의 시도로 감행된다. 복잡한 형식과 피나는 수련을 통해 실행자나 감상자나 모두 고도의 훈련을 요구하는 무용계 관행을 뛰어넘고자 한 것. 오로지 순수한 몰입만 가능하다면 전문지식이란 진입장벽 없이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는 열린 형태를 추구한 피나 바우쉬의 시도는 반세기 동안 거대한 파장을 불러온다.
현대 예술은 장르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융복합을 지향한다. 피나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패션, 미술, 무용 등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진보적 환경에서 영감을 얻고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런 교육 환경 덕분에 기술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의 표현 자체에 집중하는 독자적 형태를 창안할 수 있었다. 빔 벤더스 역시 그런 면모에 매료되었던 것. 감독이 꾸준히 제작하는 현대 예술가 기념 다큐멘터리에도 영향력을 일정 행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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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나> 스틸 |
| ⓒ ㈜에무필름즈 |
영화는 피나의 숨결이 깃든 부퍼탈 탄츠테아터 앙상블 단원들의 대표 공연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형식으로 전개된다. 첫 공연으론 1975년 초연한 초기 걸작 [봄의 제전]이 펼쳐진다. 봄의 원초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농축한 해당 공연은 기존 무용 공연과 다르게 무대 전체에 (석탄의 일종인) 갈색 이탄이 가득 깔려 시각적인 강렬함을 더한다. 단원들은 얼음과 눈에 덮혔던 대지가 동토에서 벗어나 흙냄새 물씬 풍기는 변화를 배경 삼아 새싹을 틔우며 힘겹게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처럼 도약한다. 중력을 거스르며 생의 기운을 사방으로 발산하는 춤사위다.
두 번째는 본래 무용 공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감독이 처음 본 피나의 공연인 1978년작 [카페 뮐러]다. 의자 몇 개만을 소품으로 활용하는 '미니멀리즘' 형식의 공연은 인간의 욕망과 소외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작업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찾으며 갈구하지만, 타인에게 욕망과 달리 근접하지 못하며 소통에 실패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절절히 묘사한다. 연극처럼 거창한 무대 세트 없이, 그렇다고 모든 걸 상상해야 하는 텅빈 무대도 아닌 절제된 형태에 심리를 자극하는 음악과 기예에 그치지 않는 극한의 표현력이 어우러진다.
세 번째는 피나의 무용극 스타일 집대성으로 꼽히는 1978년 초연 후 여러 차례 변형된 [콘탁트호프] 차례다. 가상의 무도회장에서 10여 명의 남녀가 실제 현실이라면 뿜어낼 오욕칠정을 표현하는 무대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서로를 살피다 서서히 속내를 드러내며 다양한 감정이 분출하며 절정에 오르는 분위기가 일품이다. 정열적인 클라이막스에 더해, 배우를 교체하며 성숙한 청장년에서 황혼에 이른 노년으로 교체하는 과정은 인생의 복잡한 단계를 관통하며 열정과 관능은 물론, 필멸자의 덧없음까지 한데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할 공연은 피나의 만년인 2006년 선보인 [보름달] 무대다. [봄의 제전]에 이어 무용 공연에 대자연의 기운을 입히는 야심이 극대화한 작업으로, 무대 곳곳에 거대한 바위와 강줄기처럼 흐르는 물줄기가 대자연을 표현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무용수는 바위에 가로막히고 물에 발목을 잡히며 불편함을 감수한 채 혼신을 다해 오감을 표출한다. 비바람을 뚫고 펼치는 군무는 풍파에 저항하며 때론 시련에 처하지만 굴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정수로 향한다. 거친 숨을 몰아치며 공포에 떨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시지프스의 현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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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나> 스틸 |
| ⓒ ㈜에무필름즈 |
공연은 물론 단막 형식의 브리지 컷에도 피나의 정수는 확고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녀가 창안한 현대 무용 방법론은 '질문하기'다. 수학 공식처럼 치밀하게 사전 조직된 연출 시나리오 대신 피나는 즉흥성을 극대화한 혁신을 단행한다. 상황과 감정에 대해 전하면 무용수가 즉석에서 대화로 소통하듯 춤으로 이를 구현하게 한 것.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단원들은 몸의 언어로 답한다. 미니 인터뷰에서 피나와의 추억을 회상한 다음 그들은 차례로 스승의 질문을 상상하며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래서 피나가 부재한 데도 관객은 피나를 느낄 수 있다.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무용을 고심한 피나 바우쉬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네 편의 무대 공연 외의 퍼포먼스는 피나가 반세기 동안 헌신한 부퍼탈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도시의 명물로 100년이 훌쩍 넘은 도시철도 모노레일 구내부터 공업도시 개성을 살린 산업공단 곳곳, 도시의 광장 역할을 담당하는 공원과 주요 교차로가 소극의 무대로 적절하게 쓰인다. 이런 입체적 공간 활용은 무대 공연과 융합해 평면적/단선적 해석을 초월하는 감각으로 승화한다.
빔 벤더스는 모든 재료를 조합해 3D 효과라는 기술적 혁신을 덧입힌다. 이미 3차원 입체 감각을 구현한 피나의 무용극 퍼포먼스를 실제 공연 대신에 극장 스크린으로 만나게 될 관객에게 어떻게 하면 누수 없이 100% 근접해 체감하도록 만들 것인가 고심한 결론이다. 평면으로 제한된 2차원 화면만이라면 당연히 무용수의 현란한 움직임과 바로 눈앞에서 드러나는 표정의 섬세함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피나와 오랜 교감에도 이렇게 더디게 걸린 것.
감독의 지론에 의하면 2D의 수치는 3D에서 제곱으로 변한다. 3D 효과로 구현된 <피나> 체험은 그야말로 무용단원들이 화면을 뚫고 밀어닥치는 것 같은 압도감으로 다가왔다. 어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보다 3D 효과의 효능감을 제대로 구현하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 첫 공개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기술실증형 상영관에서 처음 관람한 영화의 충격은 그만큼 대단했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는 반드시 티켓 끊어 현장에서 보길 고집하는 이들이라면 <피나> 역시 응당 그렇게 관람해야 마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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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나> 스틸 |
| ⓒ ㈜에무필름즈 |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이 활성화한 근본 변화 역시 촬영환경 격변과 뗄 수 없다. 보다 소형화한 카메라가 영화를 실내 세트장에서 야외와 거리로 배경을 확장하게 했다. 초기형 비디오카메라는 즉흥 촬영의 기동성을 극대화했고 디지털카메라 역시 다큐멘터리의 현장감을 다른 차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빔 벤더스는 3D 촬영기법 보급이 영화의 리얼리티에 새로운 전기를 열 것이라 확신하며 놀라운 시각효과를 세상에 공개한 것.
물론 이런 눈부신 기술력은 과시가 아닌 존경하던 동료 예술가를 향한 감독과 단원들의 이심전심 감사와 고마움의 표시로 총력을 다해 구현한 것이다. 첨단 특수효과의 향연은 그를 위한 최상의 재료에 불과하다. 그런 측면에서 <피나>는 진심과 진심이 제곱한 더없이 특별한 추모의 기록인 셈이다. 장인이 인정한 거장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하는 기예로 보낸 헌사는 완성된 지 15년이 지난 2026년에도 여전히 공감각적 경이로 가득한 채 관객을 다시금 놀라게 할 만하다.
<작품정보>
피나
Pina
2011|독일|다큐멘터리
2026.05.06. (재)개봉|103분|전체관람가
감독 빔 벤더스
출연 피나 바우쉬, 탄츠테아터 부퍼탈 앙상블
수입/배급 ㈜에무필름즈
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
2011 독일영화상 최우수다큐상
24회 유럽영화상 장편다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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