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린 아빠와 젊은 남자 좋아하는 엄마... 11살 소녀가 본 세상
[장혜령 기자]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유년 시절의 기억은 충격적인 경험이 단편적으로 남아 기억으로 환원되고 불안한 심경은 꿈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름답게 미화된 추억도 많다. 단순한 아이의 시선은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를 명쾌하게 재단한다.
지난 24일 강남의 호텔에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을 만나 신작 <르누아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첫 장편 데뷔작 <플랜 75>로 제7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에 오른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두 번째 영화 <르누아르>로 제78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았다.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감독과 더불어 일본 영화계의 차세대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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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야카와 치에 감독 & 스즈키 유이 배우 |
| ⓒ 오드 |
자전적인 경험이 토대
-<플랜 75>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회 문제를 파고든 날카로운 시선과 사실적인 연출이 돋보였다. <르누아르>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판타지적 설정이 전작과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연출 스타일의 변화를 준 이유가 궁금하다.
"<플랜 75>는 작품을 만든 계기와 테마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인데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영화적이지 않다는 의문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형언하기 힘든 영화를 만들고자 다짐했다. <르누아르>는 처음부터 <플랜 75>와 달리 접근하려고 의도했다. 저조차도 이 장면에 이러한 감정이 들었는지, 왜 이러한 의문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면서 무작위로 각본을 써 내려갔다."
-제목이 '르누아루'다. 소녀 연작 중에서도 이렌 캉 당베르의 초상화를 메인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서양을 동경하는 일본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80년대 일본은 경제적으로 융성하던 시기였는데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도 극심했다. 대부분의 가정에 르누아르 그림을 걸어두었다. 누가 봐도 가품이지만 좁은 아파트에 명화를 걸어두는 게 웃퍼서 가짜에 만족감을 느끼던 향수를 담게 되었다. 르누아르 명화 중에서도 이렌의 초상화가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다. 르누아르라는 카페 체인점이 있을 정도다. 저도 신문광고에서 본 이렌이 예뻐서 아버지를 졸라 2만 엔에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소마이 신지의 <이사>가 떠오르는 후키의 성장담이다. 레퍼런스 삼은 작품이 있다면.
"10대 때 극장에서 <이사>를 봤다. 그때 '이런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현재까지 미치게 되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영화적인가'를 생각하게 된 계기도 소마이 신지 감독 덕분이다. <르누아르>를 만들면서도 <이사>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각본 작업부터 촬영까지 함께 했으며 오마주도 많이 담았다. <르누아르>는 어릴 적 개인적 서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사>와 테마는 다르지만 연출 방식을 참고했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의도와 어른이라고 해서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 나약하고 한심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비슷하게 다루고자 했다."
-<플랜 75>에서 이어지는 '죽음'의 메타포를 <르누아르>에서는 후키 아버지에게 투영했다. 죽음으로 의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플랜 75>를 통해 죽음에 관심이 많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를 보러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때 죽음의 감수성이 특별하게 자라났던 것 같다. 죽음과 맞닿은 사람과 가족, 의료진을 만나면서 어린 마음에도 애처로움이 크게 자리 잡았다.
존엄이 상실된 인간이 얼마나 서글픈가도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으로 죽는 설정은 대부분 좋은 면만 다룬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힘내라', '사랑한다'라며 가족의 애정 속에서 따뜻한 임종을 맞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가장 끔찍한 건 존엄을 잃어버린 죽음이다. 의사로부터, 아내로부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산송장 취급을 받는 아버지는 현실과는 반대로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이 광경을 모두 보고 들었던 후키의 눈에는 모든 게 슬프게 비쳤을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외로움을 많이 탔던 아이였지만 그러면서 고독을 사랑하게 됐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인물에게 동질감과 힐링을 동시에 받았고 점점 소설이나 영화에 끌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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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메가박스중앙㈜> 스틸컷 |
| ⓒ 메가박스중앙㈜ |
"한 지붕 아래 살지만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그렸다. 이 가족은 안이 아닌 밖에서 구원을 받으려 든다. 아빠(릴리 프랭키)는 암을 치료할 무언가를 바라고, 엄마(이시다 히카리)는 자기 마음을 알아줄 상대를 찾으며, 후키는 괴로운 마음을 치료할 사람을 원한다.
아이는 부모가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느새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아이가 어른에게 한 발 더 다가서가 된다. 후키는 엄마가 젊은 남자를 보며 가슴 설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인간의 추함, 나약함까지도 냉정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아빠 병문안을 온 회사 직원이 험담하는 것을 다 듣고 나면 아빠의 존재도 작게 느껴질 것이다. 가슴은 아프지만 부모도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는 찰나를 그려보려고 했다."
-<플랜 75>의 필리핀 이주 노동자처럼 <르누아르>에도 혼혈 영어 선생님이 등장한다. 선생님이 후키를 조용히 포옹할 때 후키의 손동작이 인상적이다.
"영어 선생님은 일본과 미국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아버지 장례식 얘기에 포옹해 주는 건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미국인의 기질이다. 일본인은 남과 포옹을 잘 안 하는 편이라 후키 입장에서는 놀라움이 앞선다. 처음으로 나 대신 슬퍼해 주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안아주는 행위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어쩌지 못해서 주저하다가도 '이렇게 하면 되나' 싶어 선생님의 포옹에 손을 포갠다.
영어 교실은 외국어를 배우며 다른 사람을 만나고 국가를 초월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 입구를 열어준 사람이 선생님이고 처음으로 타인과 공감하는 순간이자 터닝 포인트다. 오프닝에도 담겨 있듯이 후키는 슬픈 장면이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볼 때도 울지 않는다. 초반에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아이였지만 선생님을 통해 변한다. 집, 학교의 좁은 세상에서 나아가 바닷가에서 서핑도 배운다. 사실 선생님과 포옹 후 선생님이 'How do you feel?'이라고 묻고, 후키가 'I feel so good'이라고 답하는 장면을 편집한 게 지금은 조금 후회된다.(웃음)"
-후키가 우는 아이를 담은 비디오를 시청하는 장면과 이웃 쿠리코(카와이 유미)의 남편 죽음과 묘한 연관성을 보인다.
"쿠리코는 우연히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남편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된다. 테이프를 봤다고 고백했고 이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수치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지만, 열쇠를 두고 와서 베란다로 들어오려다가 사고사를 당했을 수 있다. 하지만 쿠리코는 남편 죽음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후키의 최면술을 빌어 털어놓게 된다. 아이의 단순한 질문이 기폭제가 되어 어쩌면 쿠리코가 최면에 빠져들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어른이 되면 생각도 많아지고 복잡해지다 보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또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은데 아이의 태도로 오히려 진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후키는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지만 바쁜 엄마, 아픈 아빠 사이에서 방치되는 듯 보인다. 폰팅으로 만난 대학생과 직접 만나면서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후키가 부모로부터 방임되는 건 아니고 학대는 더욱 아니다. 80년 대 후반의 일본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다. 후키는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존재에게 끌림을 느꼈던 거다. 게다가 이성이 관심도 주니 기쁘면서도 두려운,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청년의 집에까지 따라갔지만 갑자기 내쫓아 버리니, 상처를 입게 된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커진다."
-후키의 여름 방학은 참 잔인했다. 아버지의 암 투병과 죽음 후 어떤 것을 배웠고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무력한 아버지였지만 후키는 가장 가까운 조력자로서 활약했다. 어른의 세계와 죽음까지도 모두 받아들이게 된다. 타인과 공감 능력이 부족했지만 여름 방학 동안 자신의 감정을 알게 되고 타인을 이해할 방법도 배웠으니, 괜찮은 어른이 되어 갈 것 같다. 안심해도 되겠다. (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일본 영화계의 10년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차기작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일본은 한국 영화계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결과로 성장한 건 분명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필두로 40대 감독이 지난 10년 동안 활약해 왔다. 그 행보를 본 젊은 감독들이 흥미로운 작품을 발표한 게 지금의 현상으로 보이는 듯하다. 차기작은 아직 결정된 게 없지만 <르누아르>와 일맥상통하는 주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지가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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