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에게 칼 들고 달려들어 사죄 받아낸 사람의 정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한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이 전 재산을 정리해 집단 망명을 했다. 한민족 최고의 가문이라며 삼한갑족으로 지칭되던 이회영 일가 60여 명이 1910년 12월 27일 국경을 넘은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신흥무관학교 같은 독립운동 거점이 백두산 서북쪽에 세워지고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약 3500명의 독립투사들이 항일 훈련을 받는 토대가 됐다.
그런 의미를 띠는 경주 이씨들의 대이동은 흔히 우당 이회영(1867~1932)을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그의 후처 이은숙(1889~1979)을 빼놓으면 이 서사가 완성될 수 없다. 한산 이씨인 그는 이회영보다 오래 살면서 가문의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해방 뒤에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덕분에 한국인들은 이 가문의 대이동과 독립운동으로부터 지식과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은숙은 백두산 서북쪽으로 망명한 이회영 가문의 이야기를 <서간도 시종기(始終記)>에 담았다. 시말서를 쓰는 심경으로 그 역사를 기록한 그는 목은 이색(1328~1396)을 책 서두에서 거론했다. 그는 "우리 방조(傍祖) 함자는 색(穡)이시고 호는 목은이시다"라며 "그분은 고려시대에 영의정으로 계셔 임군을 충성으로 섬기셨다"라고 말한다.
직계조상도 아닌 방계조상을 서두에서 거명한 그는 이색이 고려왕조에 충성하며 신왕조의 회유를 거절하다가 생을 마친 일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는 자신의 정신적 유전자에 어떤 정보가 입력돼 있으며 자기가 어떤 심정으로 이회영 가문의 활동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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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숙 선생 |
| ⓒ 국가보훈부 |
일제는 양반 지주들의 기득권만큼은 인정해 줬지만, 이회영 가문은 그것을 거부하고 해외 망명을 선택했다. 목은 이색의 충절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은숙은 이 가문과 보조를 맞춰 만주 땅으로 건너갔다. 결혼 2년 만에 시댁이 명문가에서 망명 가문으로 변했으니, 이 가문과 만난 것은 장구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남편과 함께 길림성(지린성) 유하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 이은숙은 독립투사들에게 식사와 침식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남편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독립운동진영에서 가장 꼿꼿한 두 선비에게 따지는 방법을 통해서도 자기 남편을 보호한 일이 있다.
1925년 3월 30일, 베이징에서 친일파 김달하가 암살됐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9권: 임시정부사 자료집>에 수록된 일제의 내부 보고서는 "최근 청년들로 조직된 비밀결사 다물단이라는 것이 있어 독립운동의 방해자인 일제의 정탐을 제거하고 운동계의 숙청을 꾀한다고 호언하고 불온문서를 배부하였는 바, 친일파 조선인 김달하는 본년 5월 20일(3월 30일의 오기) 밤 그들에게 암살당했다"고 기술한다.
이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이회영에게 튀었다. 김달하와 안면이 있는 이회영이 김달하의 조문을 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회영을 열혈 독립투사들의 표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소문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은 이회영과의 절교를 선언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움직이는 두 거물급 선비의 절교는 이회영의 신상을 한층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해 36세의 이은숙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는 남편의 신변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판단하에, 칼을 들고 열두 살 된 아들과 함께 신채호·김창숙을 만나러 갔다.
<서간도 시종기>는 "내가 무심히 있다가는 가군의 신분이 위험한지라, 하루는 아침 일찍 규창을 데리고 집안 식구들 모르게 칼을 간수하여 단재·심산이 있는 집에 찾아가니 아침 식사 중이라"고 한 뒤, 칼을 쥔 이은숙이 45세 된 신채호와 46세 된 김창숙 앞에서 58세 된 이회영을 이렇게 변호했다고 알려준다.
"너희 눈으로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 간 걸 보았느냐? 잘못 보는 눈 두었다가는 우리 동포 다 죽이겠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며, 말이면 다 하는가? 우리 영감의 굳세고 송죽 같은 애국지심을 망해 놓으려고 하는 놈들, 김달하와 처음부터 상종한 놈들이 저희가 마음이 졸여서 누구를 물고 들어가려고 하는가? 정말 바로 말 아니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
이은숙은 너희는 김달하를 몰랐느냐며 식사 중인 연상의 선비들을 꾸짖었다. "잘못 보는 눈"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두 지성인의 지적 능력까지 문제 삼았다. 그런 뒤, 칼 쥔 손으로 몸부림을 치며 선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은숙은 "우리들이 잘못 알고 그랬소"라는 사죄를 받아냈다고 그때 일을 회고했다.
이은숙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 잠입도 결행했다. 돈이 부족해져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생계까지 어려워지자, 신채호·김창숙을 공격한 바로 그해에 한국 잠입을 단행했다. <서간도 시종기>는 "을축년 반년은 이렇게 심고(心苦)를 겪고, 나날을 굶으며 먹으며 지내가는데, 생불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하리요"라며 생활비라도 벌어볼까 하는 심정에서 국내로 잠입했다고 서술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한국 잠입을 '생활비라도 벌어볼까'라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으로 단행했다. 일본을 우습게 생각하는 면모도 있었던 것이다. 이은숙은 고무공장 직공도 하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도 하면서 생활비와 독립운동자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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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겉표지 |
| ⓒ 일조각 |
이 공로가 크다고 인정돼 1975년 3월 27일 그에게 주어진 것이 월봉저작상이다. 독립운동가인 월봉 한기악을 기념하고 국어학자 겸 독립운동가인 이희승을 회장으로 둔 월봉한기악기념사업회는 제1회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다. 이희승과 더불어 역사학자 한우근·이기백과 대한제국 황실 전문기자 김을한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월봉저작상의 상금은 50만 원이었다.
그해 9월 5일자 <경향신문> 6면에 따르면, 서울 반포의 22평짜리 AID(미국 국제개발처) 차관 아파트의 매매가는 580~730만 원, 전세 보증금은 3백만 원, 월세 보증금은 50만원(매월 5~6만 원)이었다.
이은숙이 받은 상은 제정 목적으로 보나 심사위원들로 보나 상금 액수로 보나 상당한 권위가 있었다. 그의 수상 소식을 전한 3월 29일자 <동아일보> 5면은 이은숙을 "숨은 독립운동 공로자"로 지칭하면서 그가 수상자로 결정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여사가 이번에 수상하게 된 것은 정음문고 65권으로 최근 발간된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 시종기)>를 통해 평생 동안 벌여온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운동사 사료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이은숙의 생애가 갖는 가치는 해방 이전뿐 아니라 이처럼 해방 이후의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백두산 서북쪽에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인들이 일제와 싸워나가는 데 기여한 독립운동가이자, 그런 투쟁의 과정을 역사 기록으로 남긴 사관이다. 충신 이색을 받드는 정신을 일평생 초지일관 유지한 그는 12·12쿠데타 전날인 1979년 12월 11일 밤중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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