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대신해 사과..." 46년 만에 인정받은 적법한 투쟁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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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10월 9일 자 <경향신문> 기사 "내무부 발표 '민족해방전선' 지하조직 적발" |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10·26 사태 17일 전인 1979년 10월 9일, 구자춘은 치안본부가 수사한 결과를 언론에 직접 발표했다. 장관이 직접 나설 만큼 사안이 중대하다고 비쳐졌던 것이다. 그날의 <경향신문> 톱기사다.
"구자춘 내무부장관은 9일 북괴의 대남기본전략인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 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해 학생·지식인 및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들을 포섭, 대정부투쟁을 선동·조종하며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등으로 학원 및 사회 혼란을 조성, 민중봉기에 의한 국가변란을 기도해오던 반국가단체인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적발, 일당 74명 중 20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및 간첩 혐의로 검거하고 54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내무장관이 자신 있게 브리핑할 만큼의 대형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아닌 치안본부에 의해 발표됐다. 가장 강력한 법적 권한과 정부 예산을 배경으로 공안사건을 주도하던 중앙정보부가 내무부와 치안본부에 밀리는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에 밀리던 국군보안사령부도 그해 여름부터 '한 방'을 준비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국방부 계엄시행계획에 합동수사본부 설치의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비상계엄이 발생하면 보안사가 합수부를 주도한다'는 목표하에 준비 작업을 벌였다. 이는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도 확인된다. 10·26를 맞은 전두환은 그날 밤중에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합수부 설치를 건의했고,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흔쾌히 승낙했다가 12월 12일에 화를 입었다.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를 제칠 기회를 은밀히 모색하는 가운데, 치안본부가 중앙정보부를 무색게 만드는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3차)>는 이상우의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와 한용원의 <한국의 군부정치>를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한다.
"모든 공안기관의 위에 군림하던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에게는 김재규의 무능을 공격할 좋은 무기가 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이 권력 지형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정도는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허구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조직을 크게 부풀린 것이기에, 내무부 장관이 치안본부장을 제치고 브리핑장에 나설 만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
그러나 내무장관의 발표처럼 남민전이 적화통일을 기도하거나 북한과 연계됐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이었다. 1988년 12월 8일 자 <한겨레>는 "남민전 준비위원회는 유신 이후 국내 정치가 억압과 독재체제로 한층 굳어지던 76년 2월에 '반제 민족해방'과 '반유신 민주화'를 지향하는 전국적 범위의 통일전선적 지도조직 건설을 목표로 결성됐다"고 말한다.
그런 목표는 1970년대 중반의 제3세계에 많이 존재했다.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이 아닌 북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상황, 미국이 중동 상황을 관리하지 못해 제4차 중동전쟁과 제1차 오일쇼크를 초래한 상황은 미국을 겨냥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기운이 세계적으로 달아오르는 배경이 됐다. 이재문·신향식·김병권·안재구·권오헌·홍세화 등등이 관련된 남민전은 미국 극복과 반독재투쟁을 통해 그런 제3세계 흐름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민전이 현실적으로 수행한 활동은 목표에 훨씬 못 미쳤다. 위 기사는 남민전이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국민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한 유인물 살포 작업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그런 활동 중 하나가 남민전 사건 발표 뒤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고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가 1995년에 펴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묘사돼 있다.
1947년생인 그는 "애드벌룬을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10만 장의 삐라를 뿌려 서울 거리를, 그 무거웠던 침묵의 거리를 삐라의 바다로 만들 계획에 참여했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라며 "1978년 어느 여름날, 대낮에 나는 동대문시장에서 이해경 선배에게서 거대한 애드벌룬을 인계받았다"고 회고했다.
공포심을 짓누르며 애드벌룬을 띄워야 했던 홍세화는 "애드벌룬의 부력을 양팔에 느끼며" 시장 인파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갑작스런 여름 소나기가 일을 방해했다. "애드벌룬이 서울 상공으로 올라갈 동안, 삐라 뭉치를 묶은 말린 쑥줄이 담뱃불에 타들어가야 했는데, 비가 오면 꺼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는 애드벌룬을 날리지 못하고 비가 멈출 때까지 계속 뛰었다.
얼마 뒤 비가 멈추자, "놓아!"라는 이재문의 지시가 들렸다. 그래서 애드벌룬을 손에서 놓았지만, 서울을 삐라 바다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말린 쑥줄이 비에 젖었는지 타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고 홍세화는 회고했다.
남민전 활동 중에는 재벌가 공격이라는 예외적 사건도 있었다. 구자춘 발표문에 "도시 게릴라"와 "강도" 같은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1979년 4월 27일, 남민전 활동가들은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자택을 침투하려다가 경비 직원에게 중상을 입힌 뒤 도주했다. 검찰은 자금 조달을 위한 강도 사건으로 몰았고, 관련자들은 재벌 응징을 위한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그해 11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손달용 치안본부장은 남민전이 북한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북한도 이를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남민전이 북한에 의존하는 간첩 조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최원석 자택 침투와 관련해 '재벌 응징이 아니라 자체 자금 조달을 위한 강도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연계시키고자 할 때는 북한 자금에 의존하는 조직으로 몰아세우고, 재벌 총수의 부담을 덜어줘야 할 때는 자금을 자체 조달하는 강도 단체로 몰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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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2월 15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지난해 작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남민전 사건 재심 판결에서 46년 만에 무죄 확정을 받았다. |
| ⓒ 공동취재사진 |
1980년 12월 24일 자 <매일경제>는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 선고를 전하면서 "66명의 피고인에 대해 최고 사형에서 최하 징역 8월, 자격정지 8월, 집행유예 1년까지를 선고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남민전 리더인 이재문·신향식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숙명여대 교수인 수학자 안재구와 애드벌룬을 건넨 이해경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권오헌 등은 징역 3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남민전 운동가들의 억울함은 훗날의 재심 재판에 의해 약간이나마 풀렸다. 작년 2월 7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에 대한 과거의 판결을 취소하면서 "적법한 활동에 대해 폭행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판결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서야 무죄를 선고하게 됐다"라며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작년 4월에 작고한 고 권오헌 회장은 남민전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 확정을 받은 16번째 피해자다.
남민전은 반독재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이는 박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에도 영향을 끼치고 결과적으로 유신체제의 붕괴에도 일조했다. 재심 재판부가 인정한 것처럼 이들의 투쟁은 민주주의를 살리는 "적법한 활동"이었다. 지금의 법으로 봐도 적법하고, 당시의 법으로 봐도 적법했다. 다만, 그때는 적법성이 인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적법이든 불법이든 반정부 투쟁의 성격을 갖는 남민전 사건을 10·26 전후의 공안기관들은 적화통일을 위한 폭력혁명으로 몰아세웠다. 검찰과 법원은 거짓 논리에 따라 중형을 구형하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정부 민주화 투쟁을 반국가·반체제 폭력혁명과 등치시키던 독재정권의 폭정이 낳은 그 시절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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