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용서의 섭리를 묻다

2026. 4. 25.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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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영화 ‘밀양’ 스틸컷. 국민일보DB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의 원작으로 유명한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는 제목부터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을 다룬 이청준 작가는 범인이 사형 집행 전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빈다”라고 말한 부분에서 참혹한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소년 알암이는 학원 원장에 의해 유괴돼 죽임을 당한다. 부당하기 짝이 없는 아들의 죽음을 본 알암이 어머니는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한 그녀에게 이웃에 사는 김 집사가 교회 출석을 권하고 그녀는 결국 교회에 나간다. 그러는 중에 범인이 잡히고 범인이 원장 김도섭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크나큰 분노와 증오의 감정에 휩싸인다. 이때 김 집사가 이미 범인이 잡혔으니 증오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고를 해온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차피 사형에 처할 범인을 용서하리라 마음먹은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용서를 보여주려고 그를 찾아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절한 고통을 겪고 있어야 할 범인이 어느새 종교에 귀의해 이미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를 받고 성인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신장과 두 눈을 기증할 약속까지 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사형 집행을 기다린다며 그녀에게도 용서를 구한다. 순간 그녀는 용서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격렬한 분노를 되살리게 된다. 결국 하나님은 자식을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자기보다 한발 앞서 범인을 용서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그녀는 흐느낀다.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사형 집행 후 그녀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심판과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신의 섭리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오로지 말씀과 기도로 신의 뜻을 깨닫고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알암이 어머니는 신과 가까워지고자 할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절망하게 된다. 이는 영화 ‘밀양’에서 같은 인물을 모델로 한 주인공 신애가 보여주는 모습과 차이를 보인다.

소설 속 알암이 어머니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지만 영화 주인공 신애는 죽음을 택하지 않고 신에 대한 저항으로 절망을 표출하면서 스스로 구원 및 저항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반기독교적인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인다. 신에 의해 파괴되어간 한 가정 또는 한 여인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심하게 읽어보면 기독교적·반기독교적이라는 대립적 인식으로는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결국 이는 구원과 용서라는 문제에 대해 더없이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 작품으로 우뚝하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고 할 때 윤리적 우월감을 가지게 된다. 용서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흡족해하고, 용서받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대부분 용서를 윤리적 우월감 정도로 생각해오던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은 참으로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 용서의 기회를 하나님이 먼저 가져가셨을 때 용서 주체는 누가 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이 미소를 띠고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이 용서하면서 느낄 법한 자기 정당성까지 빼앗기며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용서를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비추어야 한다는 새삼스러운 차원에 닿게 된다. 언뜻 보아 기독교적 소재를 빌려 정반대의 비극적 이야기를 풀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은 우리가 믿고 다짐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위안적인 것인가를 되풀이해 묻는다.

다시 소설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카프카 소설의 벌레는 결국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인간이었다. 이청준의 벌레 또한 종교로 포장한 인간 보편의 자기 중심성을 향한 역설의 명명일 것이다. 이러한 자각으로부터 인간의 비루한 실존을 넘어서는 구원과 용서의 참된 섭리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꽃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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