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판 트럼프 퇴장… 심판 당한 독불장군

이가현 2026. 4. 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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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군림 헝가리 오르반 몰락
절친 트럼프 지원에도 신생정당에 참패
전 세계로 번진 권위주의 동력약화 신호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전 총리. AP연합뉴스


우파 포퓰리스트이자 유럽 내 ‘비자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16년 동안 군림해 온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전 총리의 실각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등 글로벌 정치 질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전망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치러진 헝가리 총선에서 머저르 페테르가 이끄는 신생 ‘티서당’은 199석 중 141석을 얻으면서 압승을 거뒀다. 이는 단독으로 개헌이 가능한 규모다. 오르반이 이끄는 피데스당은 55석에 그치며 참패했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지난 13일(현지시간) 총선 승리를 확정한 친유럽 성향 야당 티서당의 포스터를 든 시민이 오르반 빅토르 총리의 사진이 훼손된 입간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친러시아 여당 피데스의 총선 패배로 오르반 총리는 집권 16년 만에 실각했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가 비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패배라기보다는 포퓰리즘을 앞세워온 오르반 정권의 경제 실패에 대한 심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4일 “‘포퓰리즘의 마법사’로 불린 오르반의 마법이 풀린 순간”이라고 이번 선거를 평했다.


오르반은 그간 언론을 장악해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선전에 집중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제·안보 위협을 과장하고, EU를 헝가리의 적으로 묘사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하지만 악화하는 민생에 포퓰리즘의 마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헝가리의 2020년 이후 최근까지 누적 물가상승률은 약 57%로 이는 EU 평균(28%)의 두 배 수준이다. 반면 오르반의 가족과 친구 등 최측근들은 국가 자산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했다. 2022년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헝가리를 가장 부패한 국가로 지정하기도 했다. 의사 수 부족과 암 사망률은 EU 중 최악을 기록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헝가리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데이비드 프레스먼은 NYT에 “텔레비전(선전)과 냉장고(민생)의 격차는 결국 메울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오르반) 총리가 대저택에서 얼룩말을 취미로 키운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선전이 효과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오르반의 패배로 가장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은 EU와 나토다. 헝가리는 EU와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왔다. 오르반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밀착 관계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지원금 900억 유로(약 154조4600억원)의 대출을 가로막아 왔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두고 어깃장을 놓아 비준을 지연시켰다.

머저르 총리 당선인은 EU·나토와의 관계 회복을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내걸었다. 그는 승리를 확정 짓는 순간 “헝가리는 EU와 나토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우크라이나 대출에 대한 거부권 철회도 시사했다. 그는 총선 다음 날인 13일 기자회견에서 “헝가리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모든 이웃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길 바란다”며 “오르반 총리가 여전히 과도 정부를 이끌겠지만 그가 내 머리 위에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U는 오르반이 실권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019년부터 EU를 이끌고 있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앓던 이’가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격이라 총선 결과가 확정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축하 메시지를 냈다. 그는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한 나라가 유럽으로의 길을 되찾았다”며 환영했다.

다만 머저르 당선인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전면 단절하기보다는 ‘실용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선거 승리 직후 푸틴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헝가리가 에너지 수입에 있어 러시아에 계속 의존하고 있는 만큼 실용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급격한 노선 전환보다는 단계적 조정을 거칠 것으로 전망된다.

헝가리 총선 결과는 트럼프를 필두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해 온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전 총리(사진 왼쪽부터). AP연합뉴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3일 오르반의 실각은 트럼프의 지지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트럼프는 ‘절친’으로 알려진 오르반을 공개 지지했으며 선거 직전 J D 밴스 부통령을 헝가리에 파견하는 등 적극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패배한 것은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유럽에서 점차 동력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최근 유럽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감지된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추진한 총리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됐고,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은 지방선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뒀다.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역시 일부 지역에서 선전했지만 서부 대형 주(州) 등 핵심 승부처에서는 고전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르반의 패배는 분기점이란 평가가 나온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미 진보센터(CAP)의 로버트 벤슨 연구원은 “트럼프와 오르반은 10년 넘게 정치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며 “오르반의 패배는 트럼프를 포함한 전 세계 권위주의 세력에 대한 타격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머저르는 이제 오르반이 구축한 ‘연성 독재’ 체제를 해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정치권과 사법부, 공공기관 전반에 대한 개혁을 예고했다. 그는 “오르반의 꼭두각시들이 사임할 것을 기대한다”며 “국가자산환수청을 설립해 정치·경제 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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