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의 수도사가 기른 소년, 엄마가 그립다면서 한 일

김상목 2026. 4. 2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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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김상목 기자]

스페인 시골 마을의 작은 수도원. 어느 날 문 앞에 갓난아기가 버려진다. 수도사들은 아이를 구조했으나 부모의 종적은 찾을 길 없다. 입양을 시키려 했으나 가난한 마을에서 이마저 쉽지 않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아이는 수도사들의 보살핌 아래 수도원에서 키우게 된다. 12명 수도사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6살이 된다. 사고뭉치 개구쟁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이에게 수도사들은 '마르첼리노'란 이름을 붙여준다.

12명 '아빠'에 둘러싸여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이 행복한 마르첼리노지만, 자신에게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엄마의 존재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변화를 알아챈 수도사들은 근심이 깊어 간다. 한편 자신에겐 접근이 금지된 다락방에 몰래 잠입한 마르첼리노는 가시관을 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고 지친 모습의 예수님을 발견한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호기심이 발동한 소년은 말을 걸어본다.

탁월한 원작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스틸
ⓒ 일미디어
어릴 적 거실 서재에 꽂혀 있던 세계아동문학전집에 빠지지 않는 책이 하나 있었다. 스페인 작가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실바가 1952년 발표한 대표작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Marcelino pan y vino)"이다. 아동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죽음'과 '종교'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원문에는 시대 배경과 신앙에 관한 깊이 있는 서사가 담겼다.

소설은 출간 즉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1955년 영화화한 작품 역시 원작의 진가를 고스란히 구현한 것으로 호평받으며 널리 상영되기에 이른다. 이미 영화가 공개된 지 몇 세대가 지났어도 작품에 담긴 보편적 가치와 종교관에 대한 성찰은 시대를 초월하는 울림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공감대를 얻었다. 굳이 극장이 아니라도 성당이나 마을 회관과 공터 같은 곳에서 천 하나 걸어놓고 영사기 돌려 관람하던 경험을 가진 이가 적지 않을 테다.

동화의 얼개로 완성한 짧은 소설임에도 시간을 초월한 감동을 선사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배경지식의 유무나 원래 갖던 가치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보편성, 세파에 지친 이들에게 전하는 소박한 감동, 종교 본연의 모습에 대한 엄중한 성찰이 어우러져서다. 근대 이후 드러난 종교의 관성과 부패에 지친 이들은 작품 속 수도사들의 질박한 삶에 위로를 얻고, 마르첼리노의 순수함이 어떻게 신앙의 정수에 닿는가 목격하며 깨달음에 닿는다.

가톨릭 신앙과 문화를 기반으로 창작된 작품이지만, 굳이 특정 종교에 기울지 않아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엄마를 찾는 6살 소년과 그 간절한 호소에 응답한 절대자, 흔히 '기적'이라 불리는 특별한 소재가 등장하는데, 종교에선 까다로운 검증을 요구한다.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는 그런 높은 허들을 넘는 무척 드문 사례다.

순수한 믿음과 소박한 삶 찬미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스틸
ⓒ 일미디어
원작과 영화가 공유하는 발단은 수도원의 탄생 배경부터 출발한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 전역은 점령자 프랑스군 vs. 스페인 민중과 영국군으로 나뉘어 오랜 게릴라전이 벌어진다. 원래 성채였던 수도원 터 역시 전쟁 통에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전쟁의 상흔은 작은 마을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죽음과 파괴를 딛고 간신히 재건되어 일상을 사는 마을 사람들이지만, 과거 비극을 기억하라는 듯 성은 돌무더기로 남은 상태였다. 이 폐허에 3명의 수도사가 도착해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밝힌다. 시장은 기꺼이 이를 승낙한다.

시간이 흘러 수도원이 형태를 갖춘다. 12명으로 늘어난 수도사는 청빈과 근면, 자선으로 생활하며 수행에 정진한다.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이들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꾸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족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때 버려진 아기가 도착한다. 평범한 삶과 분리된 채 신앙생활에만 골몰하던 수도사들은 졸지에 아빠 노릇을 떠맡는다. 그들의 엉망진창 육아일기가 영화 전반부를 장식한다. 초보 아빠들의 분투 덕분에 아이는 쑥쑥 큰다.

이제 마르첼리노는 수도원의 식구로 받아들여진다. 마을 주민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안다. 못내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만, 정작 천진난만한 당사자는 딱히 아쉬움도 없다. 타인과 비교만 당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나 세속의 손길은 마침내 6살이 된 아이에게 다가온다. 한 번 시작된 질문은 그치지 않고 꼬리를 문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순수한 상태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알지 못해 오히려 행복을 누리던 아담과 이브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덮을 순 없는 노릇.

세속에 물들며 시작된 마르첼리노의 고통에 영화는 원작에서 확장된 설정을 추가한다. 마을 사람들의 허전한 영혼을 채울 영혼의 양식으로 수도원의 긍정적 면모를 기대한 전임 시장과 달리 배금주의와 탐욕을 상징하는 '자본가' 시장이 취임한 것.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거울처럼 비추는 수도원의 존재가 못마땅하던 그가 사사건건 수도사들에게 시비를 걸며 트집을 잡으려는 행태가 후반부에 위기로 작용한다. 종교가 처한 현대의 위기를 압축한 듯하다.

아이 앞에 나타난 신의 의미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스틸
ⓒ 일미디어
수도원은 신임 시장의 행패로 위기에 봉착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으나 시장은 전임자의 수도원 터 기부 과정이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반환을 요구한다. 악감정이 어지간한지 그의 훼방은 집요하게 이어진다. 사고뭉치 마르첼리노의 사소한 장난까지 시장에겐 수도사들을 공격할 꼬투리로 활용된다. 제도와 권력이란 명분 앞에 순수한 선의는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12명의 아빠는 당면한 위기에 근심하며 시름에 잠긴다. 하필 아이가 혼란에 빠진 시기에.

수도사들이 봉착한 실존의 위기와 아이에게 돌아온 해답 없는 질문이 겹치며 동화치고는 제법 심각한 긴장이 조성된다. 동시대에 태동한 네오리얼리즘 계열 작품이라면 지독하게 '현실'적인 결말이 뒤따를 테다. 수도원은 강제로 빼앗기고 수도사들은 오래 일군 터전에서 쫓겨나야 한다. 마르첼리노 역시 실정법을 들먹이며 보육원에 보내거나 강제 입양되어 불행한 운명에 전락할 게 뻔하다. 작품이 나올 당시 동시대 영화 경향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다.

영화는 명백히 네오리얼리즘과 다른 유형의 방향을 택한다. 물론 당대의 사회현실에 천착한 출발 배경은 비슷하지만, 세상 문제를 풀이하는 해법이 다른 탓이다. 스페인 출신 작가는 고국에서 자신이 목격한 좌우 이념 대립과 잔혹한 내전의 과정을 성찰하며 순수하고 소박한 공동체의 가치에 기울어진다. 여러 명분을 내건 아귀다툼이 아니라 신에게 귀의하고 본분을 다하며 검소하고 긍정적인 일상을 살아가자는 것. 회고적이긴 해도 반박하긴 어렵다.

도입부와 마무리를 장식하는 여닫는 장면은 이런 원작의 함의를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제는 전설이 된 마르첼리노의 일화는 마을의 기념 축제로 정착한 상황. 하지만 어느새 아이가 접한 기적은 잊힌 채 단지 즐거운 명절로만 남은 상태다. 병약한 아이가 축제에 끼지 못한 채 누운 가정에 방문한 신부는 자신이 겪은 기적의 의미를 아이는 물론, 까맣게 그날의 믿음을 잊고 만 부모에게도 함께 들려준다. 마르첼리노가 만약 어른이 되었다면 그도 저랬을까?

나를 돌아보기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스틸
ⓒ 일미디어
제목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는 주인공이 처한 질박한 환경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종교적 의미를 가득 담은 작명이다. 성경에서 빵과 포도주가 가진 속뜻을 안다면, 마르첼리노가 얻게 된 이 호칭이 무엇을 은유하는지 파악하긴 어렵지 않다. 고도로 상징화한 종교적 정수가 아이와 결합될 때 작중 수도사들이, 화면 밖 관객이 목격하게 될 기적이 탄생할 조건이 완성된다. 이미 내용 다 알고 봐도 그 감흥은 그다지 퇴색하지 않는다.

제작 연도에 맞춰 흑백으로 제작된 영화는 지금의 눈높이로 보면 좋건 나쁘건 '클래식'의 향취를 물씬 풍긴다. '기적'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당시 기술력 한계와 겹쳐 기적은 너무나 심심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원작의 주제처럼 곁가지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마치 이게 원래 의도인가 싶은 확장해석이 자연스레 가미되는 셈이다. 흑백 화면도 순수와 세속의 가치가 충돌하는 영화 속 배경과 잘 어우러진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대신 '마르첼리노와 열두 아빠'로 바꿔도 위화감 없는 이야기가 원작의 정수를 간직한 채 복잡한 현실을 가미해 성공적인 영화화로 귀결되었다. 수도원의 요절복통 일상에 흐뭇하다가도 봉쇄수도원 일상 다큐멘터리 감상하듯 경건하고 고요한 풍경에 감화되곤 한다. 그러나 그저 엄숙하기만 해선 안 된다. 종교가 삶과 밀착해야 하고, 희로애락을 경험해야만 온전한 형태를 갖춘다. 현대사회와 공존하려는 종교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간단한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가 갖는 유구한 생명력과 보편성은 바로 그런 통찰에서 비롯된다. 아이를 측은히 여기는 인지상정이 어떻게 위기에 처한 종교가 가야 할 방향과 연결되는가, 중세의 과도한 간섭과 참견이 아니라 물질만능주의에 휩싸인 현대의 어린양을 구원할 수 있을지 고심이 묻어난 원작의 정수를 거의 누수 없이 농축한 이제는 '고전' 반열에 등극한 1955년 영화가 이제는 제목조차 낯설어진 관객 앞에 돌아온다.

<작품정보>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MACELLINO BREAD AND WINE
1955|스페인, 이탈리아|드라마
2026.05.01. (재)개봉|85분 51초|전체관람가
감독 라디슬라오 바다
각본 라디슬라오 바다,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실바
음악 파블로 소로자발
주연 파블리토 칼보, 페르디난도 레이
원작 호세 마리아 산체스 실바, 소설 『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수입/배급 일미디어(IL Media)

1955 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1955 8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및 특별상
 ㅡ빵과 포도주의 마르첼리노> 포스터
ⓒ 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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