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불확실성 시대, 한국경제의 생존공식
초불확실성의 충격을 성장의 발판으로 바꾸는 한국형 산업전략은 무엇인가. AI는 화두가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이다. 미루면 일본이 되고, 서두르면 기회가 된다. <기자말>
[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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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4월 22일 세계경제연구원과 포스코그룹이 공동주최한 '초불확실성의 시대, AI 주도산업 지형 재편: 한국 경제 재도약의 길' 국제콘퍼런스에서 전광우 이사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
| ⓒ 김영근 |
지난 4월 22일 세계경제연구원과 포스코홀딩스가 공동 주최한 국제컨퍼런스의 주제는 '초불확실성 시대, AI 주도산업 지형 재편: 한국 경제 재도약의 길'이었다. 지정학 리스크, AI 혁명과 산업 대전환, 국가·기업 경영전략의 세 축으로 구성된 이 행사는 단순한 토론의 장을 넘어, 한국 경제의 새 좌표를 설정하는 자리였다. 한국의 대표적 제조업 그룹과 경제 싱크탱크가 손을 잡고 이 주제를 정면에 내건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였다.
세계경제연구원 전광우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지정학적 분절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 급변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가 직면한 도전을 짚고, AI 중심 산업 대전환 시대에 국가와 기업이 갖춰야 할 미래 경쟁력과 전략적 대응 방안을 함께 모색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미국도 WTO도 더 이상 버팀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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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칙이 흔들리는 세계: 후카가와 교수의 경고" 와세다대학교 후카가와 교수는 "전례 없는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규범기반 국제질서가 약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수십 년간 성장해 온 자유무역 질서와 미국의 공공재 제공 역할이 동시에 축소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
| ⓒ 김영근 |
그의 발언이 더 묵직하게 울린 이유는, 일본 역시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 모두 미국 시장과 중국 공급망에 깊이 의존해 온 수출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은 한일의 공통 과제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규칙이 재편되는 시기일수록, 먼저 판을 읽고 새 구조에 자리를 잡은 쪽이 수혜자가 된다. 한국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16조 달러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단 조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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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페르난데즈(화면 속) MSCI 회장이 22일 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 전광우)과 포스코그룹이 공동 주최(서울 웨스틴서울파르나스호텔)한 '초불확실성의 시대, AI 주도산업 지형 재편: 한국 경제 재도약의 길' 국제콘퍼런스에 원격화상 라이브로 참석해 전광우(단상 중앙) 이사장과 대화를 하고 있다. |
| ⓒ 김영근 |
AI에 대해서도 그는 냉정했다. "기술 수용속도가 빠른 한국이 선제 도입에 나선다면, 불확실성을 격차로 전환할 수 있다." 한국의 빠른 기술 흡수력과 제조 역량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조건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일본은 30년을 잃었다, 한국에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이날 행사에서 가장 무게감 있게 울린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오래 침묵해 온 쪽에서 나왔다. 아베노믹스 10년을 설계하고 집행했던 당사자, 구로다 하루히코 전 일본은행 총재였다. 그는 '통화정책과 구조개혁의 조화가 장기 성장의 핵심'이라 강조하며, 자신이 주도한 대규모 금융완화의 성과와 한계를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1998년 이후 15년간 지속된 디플레이션이 기업과 가계의 기대에 깊이 뿌리내린 상황을 바꾸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고백이었다.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어도, 구조전환이 뒤따르지 않으면 부양책은 시간을 살 뿐이라는 교훈이다. 아베노믹스의 설계자가 그 한계를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그러나 구로다 전 총재는 한국 경제를 향해서는 단호한 낙관론을 내놓았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과 모두 원만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지경학 질서에서 이것은 중요한 강점이다." 글로벌경제가 분절화하는 국면일수록, 주요국 어느 쪽과도 대화 채널을 열어둔 나라의 전략적 가치는 커진다는 진단이었다. 한국의 1인당 GDP가 일본을 처음으로 초과한 현실을 언급하며, 그는 "인적자본과 기업가 정신 간 균형이 잘 갖춰진 나라"로 한국을 평가했다. 다만 중동·아프리카·남미 시장으로의 수출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수출 다변화의 필요성도 함께 강조했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보내는 동안 디지털전환(DX)을 미루고 생산성 정체를 방치한 끝에, 노동력 감소가 산업 생존 자체를 위협하자 이제서야 자동화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40년까지 피지컬 AI 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 30%를 목표로 내걸고 9조 엔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뒤늦은 출발을 속도로 만회하려는 절박함이 그 숫자에 담겨 있다.
한국이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은 '따라가자'는 구호가 아니라, 미루는 비용이 얼마나 커지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태도다. 구조 전환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하게 돼 있다. 문제는 언제, 얼마의 대가를 치르고 하느냐다. 결단이 늦어질수록 청구서는 더 무거워진다.
AI는 모두를 구하지 않는다: 격차를 키우는 또 다른 엔진
한국 경제에는 분명한 버팀목이 있다. AI 확산은 반도체, 데이터센터, 고성능 컴퓨팅 등 주력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열고 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AI를 적극 도입할 경우 생산성이 1.1~3.2%, GDP가 4.2~12.6% 높아질 잠재력이 있다. 인구 절벽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AI로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AI 호황이 경제 전반의 호황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딜로이트 분석에 따르면 피지컬 AI는 향후 3년 안에 현재 5%에서 41%의 기업이 조직 혁신을 체감할 것으로 전망되며, 제조·물류·창고업에서 먼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혜택이 특정 산업과 대형 기업에 집중될수록, 이미 벌어진 격차는 더 심화된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지정학적 공급망 불안이 겹치면 AI 수요 확대의 과실도 일부 상쇄될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AI 낙관론'에 취해 현장 실행을 소홀히 하는 일이다. AI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산업 간·기업 간 격차를 더 벌리는 새로운 축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AI 호황 자체가 아니라, 그 성과를 경제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연결하는 구조를 만드는 능력이다.
공장이 바뀌지 않으면 전략도 구호에 불과하다
임지원 포스코경영연구원 원장은 '제조업이 구조적 비용 상승 국면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원자재·에너지·인건비가 동시에 오르는 구조에서 살아남으려면 공정 효율화와 품질 자동화 외에 선택지가 없다. AI와 자동화는 이미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 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을 AI 도입의 글로벌 선도권으로 평가하면서도 '효과가 규모가 크고 성숙한 기업에서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중소기업의 AI 도입수준이 주요국보다 낮고, 다수 기업이 AI 활용지침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은 이미 AI를 전략 자산으로 운용하지만, 제조업의 허리를 떠받치는 중소·중견기업은 여전히 도입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간극을 좁히지 않으면 'AI 강국 한국'은 통계 속 숫자에 불과하다. 정책의 무게중심을 대기업 중심의 플래그십 투자에서 현장 중소기업의 실질적 전환 지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AI가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재도약은 구호에 그친다.
로드맵은 충분하다, 지금 필요한 건 실행이다
성윤모 중앙대학교 석좌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는 '초불확실성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국가/기업 경영 전략' 세션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AI 제조로 산업 대전환을 적극 추진해 주력산업과 신산업을 지능화·친환경화·융합화해 대체 불가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는 올해 초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거시경제 적극 관리, 잠재성장률 반등, 국민균형성장, 대도약 기반 강화의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청사진은 충분하다. 그러나 성패는 예산 규모보다 현장에 닿는 속도에서 갈린다. 한국 정책의 오랜 약점은 설계 과잉과 실행 부족이다. 계획은 정교해지되 실행은 얕아지고, 현장에 닿기 전에 다음 구상으로 덮이는 순환. 그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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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윤모 중앙대학교 석좌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는 '초불확실성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국가/기업 경영 전략' 세션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AI 제조로 산업 대전환을 적극 추진해 주력산업과 신산업을 지능화·친환경화·융합화해 대체 불가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
| ⓒ 김영근 |
AI를 '잘 아는 나라'와 '잘 쓰는 나라': 한국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미국은 AI에 수조 달러를 쏟아붓고 있고, 일본은 뒤늦게 피지컬 AI 국가전략으로 만회를 노리고 있다. 그 사이에서 한국이 택할 경로는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정밀한 실행이다. 초불확실성의 시대, 산업 전략은 낙관이 아니라 위험관리에서 다시 써야 한다.
한국은 AI를 잘 아는 나라를 넘어, 이미 잘 쓰는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조선에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술력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세계에서 손에 꼽힌다. AI의 미래 경쟁력은 '기술 보유'가 아니라 '활용 구조'에서 결정된다. 잘 만드는 국가보다 실제로 작동시키고 끊임없이 개선하는 국가가 주도권을 쥔다.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에서 이미 그 역량을 세계에 증명했다. 이제 같은 역량을 AI 대전환 프로세스에서 다시 발휘할 차례다.
일본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한국은 '한 발 늦었지만 앞선 기술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능력을 역사적으로 거듭 입증해 왔다. 제조·에너지·공공서비스 등 실제 문제 해결 수요가 집약된 한국의 산업 환경은, 피지컬 AI와 산업용 AI를 가장 빠르게 실증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실험장이기도 하다. 초불확실성의 시대, 흔들리는 산업 질서 속에서 하방 위험을 줄이고 상방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이 가장 잘해온 방식이다. 한국 경제 재도약의 길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증명된 역량을 AI라는 새 무대에 다시 펼치는 데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 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 및 "북핵 리스크 관리와 국제안보레짐의 변용",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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