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의 교실, '아는 교육'만으로는 너무 늦었다
[김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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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위기 |
| ⓒ li_anlim on Unsplash |
기후위기의 본질은 단지 기온이 오르는 데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위기가 분명히 진행 중인데도 사회가 그것을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재난은 이미 시작됐는데 감각은 아직 평시(平時)에 머물러 있다. 공기는 나빠졌는데 사회는 멀쩡한 척한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둔감함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깊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인물이 칼 세이건이다. 그는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과학기술은 점점 더 사회를 지배하지만, 시민들은 정작 그것을 비판적으로 이해할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진실보다 기분 좋은 확신에 기대게 되고, 결국 사회는 미신과 어둠으로 미끄러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경고는 먼 나라의 비관이 아니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그 말은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다.
나는 요즘 기후위기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태도에서 바로 그 반지성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반지성주의는 무식함이 아니다. 오히려 많이 알고 있는 척하면서도, 정작 불편한 진실 앞에서는 판단을 멈추는 태도에 가깝다. 복잡한 문제를 견디지 못하고, 과학적 사실을 생활의 변화로 연결하지 못하며, 결국 "너무 과장된 것 아니냐", "어차피 내가 뭘 해도 안 바뀐다"는 말로 물러서는 습관 말이다. 이 사회는 기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삶을 바꾸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만들어낸다.
그 자기합리화는 늘 익숙한 얼굴로 나타난다. 일회용 컵 하나쯤이야, 비닐포장 조금쯤이야, 가까운 거리인데 차 좀 타면 어때서, 이 정도 소비가 무슨 문제냐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행위가 아니라, 그런 생각들이 모여 만든 시대정신이다. 많이 소비하는 것이 능력이고, 더 편리한 것이 진보이며, 불편을 감수하자는 말은 유난이라는 인식. 이 인식이야말로 기후위기를 키운 진짜 배경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성장과 효율을 말해왔지만, 그 성장의 끝에서 정작 살아갈 토대를 갉아먹고 있다.
더 답답한 것은, 위기를 말하는 사람을 향한 사회의 태도다. 기후를 이야기하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하고, 소비를 줄이자고 하면 현실을 모른다고 한다. 청소년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면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핀잔을 준다. 시민성을 가르친다면서 시민의 목소리는 불편해하고, 비판적 사고를 말하면서 실제 비판은 버릇없다고 취급하는 사회. 나는 이 모순이야말로 교육의 민낯이라고 본다.
학교 역시 이 위기에서 비껴 서 있지 않다. 학교는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법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더 열심히 가르쳐왔다. 더 높은 성적, 더 좋은 대학, 더 안정된 직장, 더 많은 성취. 교육은 삶을 성찰하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축소됐다. 그런 구조 속에서 환경과 생태는 늘 후순위로 밀린다. 시험에 안 나오면 중요하지 않고, 입시에 도움이 안 되면 시급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교과서 안에서는 심각하지만, 학교생활 안에서는 주변적이다. 배우지만 실천하지 않고, 알지만 바꾸지 않는 교육. 이것이야말로 가장 실패한 교육 아닌가.
나는 이제 교육의 중심 문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유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에서, 덜 파괴하고 함께 살아남는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으로 옮겨가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학교가 가르쳐야 할 것은 성장의 기술이 아니라 생존의 윤리다. 학생이 탄소중립의 정의를 외우는 것보다,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환경교육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양식의 문제여야 한다. 아는 것에서 끝나는 교육은 너무 늦었다. 이제는 실천을 조직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내가 더 절박하게 느끼는 이유는, 기후위기가 결국 불평등의 문제로 번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나쁜 공기를 견디고, 누군가는 더 나쁜 물과 더 뜨거운 집에서 버텨야 한다. 누군가는 기후재난을 비용으로 막아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몸으로 먼저 맞는다. 그러니 기후위기는 단순한 환경 이슈가 아니라, 어떤 사회가 더 위험을 떠안게 되는가의 문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개인의 작은 습관이나 캠페인 수준으로만 축소하고 있다. 위기의 크기에 비해 대응은 지나치게 가볍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가. 나는 그 이유가 우리 사회가 너무 오래 "성장"을 유일한 선으로 숭배해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장하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고, 더 많이 가지면 더 안전해질 것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나는 것은 정반대다. 무한한 성장의 욕망이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한 삶이 결국 더 불안정한 생태를 만들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성장의 언어만으로는 이 시대를 설명할 수도, 구할 수도 없다.
칼 세이건의 경고를 오늘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학을 모르는 사회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알고도 불편한 진실을 밀어내는 사회가 더 위험하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가장 무서운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감각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교육은 무지한 교육이 아니라,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게 만드는 교육이다.
아침마다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나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우리는 어른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위기를 설명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위기를 멈추기 위한 불편은 감수하지 않는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교육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더 성장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가르치는 일. 더 많이 가지는 법이 아니라, 덜 파괴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학교가 맡아야 할 가장 급한 미래교육이다.
공기는 이미 변했다. 계절도 변했다. 이제 바뀌지 않은 것은 우리의 판단뿐이다. 그 판단이 계속 늦어진다면, 기후위기의 다음 피해자는 미래세대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김대성씨는 별의별 교육연구소장, 상인천초등학교 교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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