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끌려가 고막 터져도 지켰다…구순 노기자의 ‘드래곤볼’

김남준 2026. 4. 23.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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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언론인 심상기(90)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을 겪고 난 후 어렵게 입사한 경향신문은 박정희 정권의 압력에 강제매각 됐다. 1965년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군사정권 속에서 파란만장한 기자 생활을 겪었다.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용산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남산 끌려가서도 취재원 지킨 기자


19일 서울문화사에서 만난 심 회장은 인생 굴곡의 순간에서도 “내 할 일만 바르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담담히 회고했다. 실패를 기회로 여기고 도전한 덕에 심 회장은 기자로서도 출판사 경영인으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펴낸 그의 자서전 제목도 구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내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로 붙였다.

심 회장의 강단은 기자 시절부터 길러졌다. 1972년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심 회장은 7·4 남북공동성명보다 두 달 앞선 그해 5월 중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방북 사실을 취재했다. 하지만 이는 특종이 아니라 큰 고초로 이어졌다. 취재 사실을 안 중정에서 취재원을 대라면서 심 회장을 ‘남산’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구타까지 당했지만, 취재원을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심 회장은 “맞고 나니 절대로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 부장 방북 사실을 말해 준 사람은 내가 이 일로 중정에 고초를 겪은 사실을 지금도 모른다”고 했다.


보안사 정치권유 거절에 미운털


심 회장은 1980년 6월, 중앙일보에서 ‘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편집국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수난은 계속됐다.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사태를 편집국 수장으로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중앙일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사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확산했다.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보안사령부를 앞세워 비판적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기자를 강제 해직시켰다. 이때 동양방송(TBC)은 한국방송공사(KBS)에 강제 통폐합되고, 24명의 중앙일보 기자가 펜대를 놓아야 했다.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용산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심 회장은 정국을 휘두르던 보안사에게 정치 참여를 권유받았다. 민주정의당 창당을 비밀리에 추진 중이었던 보안사는 정치 신인들을 발굴하기 위해 유력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출마를 종용했다. 심 회장은 “보안사 관계자가 충남도당 위원장직을 거론하며 ‘대전에 가면 다 안내해줄 것이니 빨리 내려가라’고 채근했다”면서 “‘편집국장이나 열심히 하겠다’ 했더니 ‘중앙일보는 무사할 것 같으냐’는 위협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심 회장은 “국회의원은 정권 거수기나 했기 때문에 하기가 싫었다”고 했다.

출판담당 이사로 옮기며 잡지 시장에 눈 떠


전두환 정권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던 심 회장은 1983년 10월, 3년여 만에 편집국장직에서 내려와 중앙일보 출판담당 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일은 심 회장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출판담당 이사에서 시작해 상무로 재직하며 잡지 등 출판업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다. 한국 신문사 최초로 대백과사전을 단행본으로 냈고, 백상 같은 큰 상도 받았다. 출판업의 가능성을 본 심 회장은 53살의 나이로 중앙일보를 떠나 퇴직금을 털어 1988년 서울문화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여성 월간지 ‘우먼센스’를 창간했다. 우먼센스는 창간호부터 계속 매진돼 4번이나 인쇄를 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12만부 가깝게 팔렸다.

드래곤볼 첫 정식 수입해 대박


더 큰 도전은 만화 잡지였다. 중앙일보 출판담당 임원으로 일하며 일본을 자주 오고 갔던 심 회장은 만화 시장의 가능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만화 ‘드래곤볼’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었다. 심 회장은 우먼센스를 만든 그해, 주간 만화 잡지인 ‘아이큐점프’도 창간하고, 드래곤볼을 정식 연재했다. 드래곤볼의 인기 덕에 아이큐점프는 호당 20만 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심 회장은 부도 위기에 처한 일요신문과 시사저널까지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미디어그룹을 일궜다.

“꺾이지 않고 정도 걸으면 길 있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나이이지만, 심 회장은 지금도 매일 회사에 출근해 회사 전반을 살피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 가져올 미디어 시장의 변화에 대해 공부하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AI 기술 도입으로 미래가 불확실해진 후배 언론인과 청년들에게 해줄 말을 묻자 심 회장은 “나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려움을 겪더라도, 실패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꺾이지 말고 정도(正道)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언제든 길은 반드시 나타나게 돼 있어요.”

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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