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직전 또 다른 국가폭력" 왜 정부는 사과하지 않나요
[하성태 기자]
사북항쟁 46주년 당일이던 지난 21일, MBC <PD 수첩>의 제목은 심플했다. '1980 사북'. 지난해 10월 개봉한 동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었다. 이날 <PD 수첩>의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이는 바로 영화 <1980 사북>의 박봉남 감독, 한경수 프로듀서였다.
<1980 사북>은 다큐가 지니는 두 가지 속성을 충만하게 채워가고 있는 작품이다.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대상과 제22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개봉 이후 1980사북시민상영위원회가 후원하는 상영회를 통해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까지 사북 사건을 몰랐던 관객을 만나고 있는 것이 첫째다.
둘째는 운동으로서의 역할이다. <1980 사북> 개봉을 계기로 국가 사과 이행 촉구 운동이 펼쳐지는 중이다. 시민초청상영회와 연결된 늦은 메아리 운동은 관련 서명 운동을 펼치는 동시에 지난 3월 이 결과를 대통령실과 국무조정실에 발송했다.
이 모두 박봉남 감독이 6년여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완성한 <1980 사북>의 공개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영화 속 등장하기도 하는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역시 영화 공개와 맞물려 목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북항쟁동지회와 유족들은 지난 14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공식 사과와 피해 회복 조치 등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권고를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21일로 예정됐던 46주년 기념식도 2년 연속 연기했다. 이 역시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공식 사과와 관련해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서 <PD 수첩>이 박봉남 감독과의 협업으로 <1980 사북>을 다룬 것은 실로 시의적절했다. 그간 여타 매체와 협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1980 사북>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는 박봉남 감독과 한경수 PD와의 협업은 남다른 동시대성에 더해 영화와의 그것이라 특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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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
| ⓒ 엣나인필름 |
그해 4월 21일. 광부들이 들고 일어났다. 광산노조 동원탄좌지부 이재기 지부장의 침묵과 방관을 더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다짐과 동참의 결과였다. 하지만 탄광엔 경찰들이 즐비했다. 광부들이 상황을 채증하던 경찰을 발견했고, 지프차로 도망치던 경찰이 광부 한 명을 치어 사망하게 만들었다. 광부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제부터는 죽기 살기였다. 흥분한 광부들이 탄광 일대를 점거했다. 노조 지부장의 부인을 잡아다 사적 제재를 가하기까지 한다. 이어 경찰과 광부들이 대치했다. 광부들과 가족들이 유일한 진입로인 안경다리 터널로 들이닥치는 경찰들에게 투석전을 벌였고, 결국 전도유망했던 젊은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피해자로 되돌아가는 어이없는 상황의 연쇄 속 노사정 합의가 이뤄진다. 이 배후에 전두환 신군부가 도사리고 있었다. 철저한 언론 통제가 이뤄지던 시기, 광부들과 경찰들의 대치는 언론에 의해 난동으로 규정됐다. 더 나아가 11공수여단을 포함한 1220여 병력이 사북 진입 작전을 코앞에 두고 총구를 돌렸다. 11공수여단은 광주에 투입됐던 그 공수부대였다.
1980년 4월 24일 3차에 걸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서울의 봄' 이전에 '사북의 봄'이 오는 줄로만 알았다. 전두환 신군부가 그럴 리 없었다. 신군부는 광부들의 투쟁을 빨갱이들과 고정간첩이 벌인 폭동과 난동으로 규정했고, 국가폭력을 동원한 보복이 이어졌다. 전두환이 지시한 '사북 합동수사단'은 광부들과 주민들 140여 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이어 경찰들은 가혹한 고문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1980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일어났던 노동쟁의가 사북 사건으로 인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강경 진압이었다. 이러한 강경 진압은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과 같은 성격이 짙었다. 사북을 기억하며 광주를 떠올리는 일은 역사적인 귀결과도 같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휘하에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을 설치했고, 합동수사단 단장은 1001 보안부대장, 부단장은 중앙정보부 강원지부 수사과장 그리고 원주지청 검사. 경찰이 맨 아래고 그 위에 중앙정보부와 검찰, 최상단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이미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 보시면 되는데 문제는 무엇을 명분으로 어떠한 정치적 단계를 밟아서 정권을 잡느냐." (국정원 출신 박선원 국회의원, 'PD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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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
| ⓒ 엣나인필름 |
우선 당사자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로 사북 사건의 총체성을 담보한다. 사건 당시 투쟁의 최전선에 위치하며 고초를 겪었던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전 회장을 비롯해 생존한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절제해 엮어낸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사북 사태'로 프레임화 됐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자 하는 노력 어린 그 시선 자체를 평가할 만하다.
어떤 당사자성이 피해자로서의 성격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왜 또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느냐"라며 억울함과 피해를 호소하는 어용노조 지부장의 아들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1980 사북>은 투쟁 가운데 일부 과격했던 행위들의 잘잘못을 짚는 동시에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객관화하는데 물러섬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광부들이 던진 돌을 맞고 큰 부상을 입었던 경찰이 당시 자신의 목숨을 살렸던 이 또한 광부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와 반대로, <1980 사북>에 없는 목소리는 자명하다. 광부들과 가족을 극심하게 고문하며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린 '사북 합동수사단'에 참여한 이들과 전두환 신군부 내 지시자들 말이다.
<1980 사북>의 시선은 과거 사건 조명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군부의 그 광폭한 기획이 투쟁에 가담했거나 단순 동조한 광부들과 가족들의 삶을, 그 아들딸들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또 살아남은 이들의 40년 넘는 세월을 어떻게 망쳤는지를 강단 있게 묘파한다. 그리하여 왜 지금 현재 사북이란 국가폭력이자 비극적 역사를 재조명해야 하는지를 설득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명백한 고문, 폭행, 인권 유린이 있었죠. 이것은 명백한 국가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국가과 사과하는 것이 맞습니다. 정권이 유한하다고 하더라도 사실 국가는 영속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국가 폭력에 대해서는 지금 정부라도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선희 국회의원, 'PD 수첩')
두 국회의원과의 인터뷰를 포함해 <PD 수첩>은 영화 개봉 이후 다 담아내지 못한 현재적 주장과 설명을 더해 그 의미를 더했다. 사북 사건을 직접 판결했던 임원배 변호사(전 계엄보통군법회의 군판사)의 국가를 대신한 사과도 그 중 하나였다. <PD 수첩> '1980 사북'은 그렇게 박봉남 감독과 영화가 진심으로 조명한 그 비극적 현대사의 진실을 지상파로 타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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