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항행의 자유, 미국 대통령이 훼손한 원칙

40년 넘게 진행한 FONOPs 도덕적 명분마저 상실할 위기
호르무즈 파병 검토 중인 한국 글로벌 책임 어디까지 질 수 있나
호르무즈해협 통행료 징수를 언급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메시지는 압권이었다. 자신을 예수에 비유한 사진과 이란 문명을 파괴하겠다는 발언에 못지않았다. “해협의 교통 체증을 처리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준 충격은 그 어떤 게시물보다 더 컸다. 미국이 확립했고, 지금도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는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에 근거한 국제질서를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부정했기 때문이다.
항행의 자유는 어떤 나라든 제약 없이 모든 바다를 다닐 수 있다는 국제법적 원칙이다. 공해와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포함한 국제해역은 물론이고 영해(무해통항권)와 해협(통과통항권)에 모두 적용된다. 고대 로마제국과 오스만튀르크도 일부 수용했고, 대항해시대를 거쳐 공감대를 얻은, 가장 오래되고 널리 인정받은 바다의 질서다.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양자조약으로 유지되던 항행의 자유는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이 채택되면서 보편적 규약이 됐다. 협약에는 171개국이 비준했다. 강제력 없는 국제법은 무용지물이지만 UNCLOS에는 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이라는 배경이 있다. 레이건 행정부 때 시작된 항행의 자유 작전(FONOPs)이 그것이다. 해군 전함이 해양 주권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나라의 영해를 사전통보 없이 통과하는 게 작전의 핵심이다. 세계 곳곳에서 매년 수십 차례 이뤄진다.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한 차례 작전에 쓰이는 이지스 탑재 구축함의 연료비만 160억원이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를 앞세워 바다를 지키는 수호자의 지위를 굳혔다. 물론 영해를 ‘침범 당한’ 나라의 반발은 거세다. 흑해의 구소련 영해 안에서 작전 중인 미국 순양함을 소련의 프리깃함이 고의로 추돌한 사건도 있었다. 남중국해의 정기적 FONOPs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동맹국에도 예외는 없다. 2021년 대한해협 일본 영해 안에서, 그 다음해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실시됐다. 미국은 반발을 명분으로 눌렀다. UNCLOS에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았지만 미 해군 전함은 지금도 바다를 순찰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해협의 통행료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트럼프의 돌출 발언이 나온 것이다. 트럼프는 첫 집권 때부터 비용분담을 위해 동맹국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 결과 2017년부터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가 차례로 남중국해 FONOPs에 합류했다. 일본도 적극적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동맹국들은 미국의 변화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통행료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호르무즈는 국제무역의 핵심 통로로 결코 선박의 통행을 중단시킬 수 없는 통과통항권이 존재한다. UNCLOS에는 어떤 수수료도 부과할 수 없다는 조항(26조)도 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협상 결과 이란의 통행료가 인정된다면 자유무역에 기반한 지금의 국제질서는 급속한 몰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통행료가 무산돼도 트럼프의 발언과 미 해군의 해협 봉쇄로 미국의 명분은 이미 크게 손상됐다. 이란 전쟁이 끝난 뒤 중국이 호르무즈를 선례 삼아 남중국해에서의 FONOPs를 방해하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을 불사하고 힘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다시 시작된다. 우리 정부는 종전 후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호르무즈에 군함을 파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제사회를 향해 “항행의 자유 보장을 위해 실질적인 기여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파병 자체를 금기시했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란 전쟁이 불러온 엄청난 변화다.
그렇다면 말라카해협은 어떤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한국도 동참해야 한다는 미셸 박 스틸 주한 미대사 지명자의 8개월 전 인터뷰가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한국계 마가’로 불리지만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항행의 자유라는 글로벌 원칙을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다시 검토해야 한다. 여론의 추이도 중요하다. 전쟁이 끝나면 동맹국을 향한 트럼프의 청구서가 쏟아질 것이다. 뭉뚱그린 논리로 “무조건 안 돼”라고 버티기 어렵다. 스스로 원칙을 훼손했어도 청구서 자체를 유보할 트럼프가 아니다.
고승욱 대기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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