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인간사] 꽃 피울 계획

2026. 4. 22. 00:1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석제 소설가

올 초봄 어느 벗이 문득 매화 소식을 전해왔더랬다. 몇 해 전 남쪽 지방 매화축제 때 자전거를 타러 갔다가 매화나무 한 그루를 화분으로 얻어왔는데, 그 매화나무가 ‘예년’과 달리 2월 들어 단 한 송이의 꽃만을 피웠다고 하는 것이었다.

예년이라 함은 그 매화나무 한 그루에 대여섯 송이의 꽃이 은은한 향기와 함께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가 물으니, 지난해 몇달 간 낡은 아파트를 수리하는 대공사를 벌였는데 매화나무가 공사 때 발생한 먼지와 화학물질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워낙 성품이 고결한 매화이니 먼지나 진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무가 환경변화 때문에 위기를 느꼈다면 번식을 위해 꽃을 더 많이 피워야 하는 게 아닐까?”

「 월드컵 결승만큼 복잡한 개화
전년 여름과 가을에 계획 세워
총적산온도 등 채워져야 꽃 피어
생명의 경이는 멀리 있지 않아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만개한 홍매화 아래로 우산을 쓴 한 시민이 산책하고 있다. [뉴시스]

개화에 미치는 집수리의 영향
몽매한 나로서는 매화나무가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자손을 남기기 위한 활동을 줄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간절히 알고 싶어졌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매화·산수유·벚꽃·목련·개나리·진달래·복숭아꽃·살구꽃·배꽃·사과꽃·조팝꽃·철쭉…수천수만 종, 수많은 꽃들이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꽃이 피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종족 번식이라는 식물의 본능 때문이다. 다만 식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암술과 수술이 만나 씨앗을 맺게 하는 데는 매개체(곤충·새·바람 등)가 필요하다. 식물은 유혹적인 향기, 화려한 색깔의 꽃을 피우거나 달콤한 꿀(보상)을 제공함으로써 귀한 손님(벌)이 꽃가루를 운반하게 한다.

또한 꽃을 피우는 식물은 일정한 기간 동안 따뜻한 열량(온도·온기)이 개체별로 충분히 쌓여야 비로소 꽃망울을 터뜨린다고 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수치화한 것이 ‘총적산온도(Total Accumulated Temperature)’이다. 곧 ‘잠에서 깸(휴면 타파) 이후 식물에 일정 온도 이상의 열에너지가 얼마나 쌓였는가’(2월경까지 매일의 평균기온을 합산한 값)를 말한다.

지역과 기상 상황, 개체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적인 봄꽃들의 예상 총적산온도는 개나리 80~100℃, 진달래 100~120℃, 벚꽃 250℃이다. 이 수치는 농작물의 개화 시기와 수확 적기를 예측하거나, 지자체에서 꽃 축제 일정을 잡을 때 주요 지표가 된다.

온도만큼이나 식물의 개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태양 복사 에너지(빛)를 하루에 얼마나 받았는지를 총량으로 계산한 수치를 ‘총적산광량(Total Accumulated Radiation)’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식물이 낮과 밤의 길이를 측정해 받은 빛의 총량을 채우면 개체 내 단백질이 ‘꽃을 피울 시기’에 관해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개화뿐만 아니라 식물의 성장, 수확량 등도 이 누적된 광량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놀랍게도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 대부분은 꽃을 피우기 훨씬 전, 전년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미리 이듬해에 꽃을 얼마나 피울지 계획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꽃눈 분화’라고 한다.

나무는 여름에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광합성을 해 양분을 축적한 뒤 겨울잠을 잔다. 나무가 잎을 단 채 겨울을 났다가는 수분이 잎의 기공을 통해 빠져나가고, 심하면 그런 과정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살아남은 나무(온대 과수인 사과·배·포도 포함)는 낙엽이 진 후부터 다음해 2월경까지의 겨울 동안 일정 온도(0~7℃)의 ‘추위를 겪는 시간’을 충족해야 한다. 이를 ‘저온요구도(Chilling Requirement)’라 하며 식물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봄에 정상적으로 발아·개화하기 위해 필요한 누적 저온 시간을 말한다. 나무 품종마다 다르지만 대략의 경우 저온요구도가 1000~1500시간 이상 필요하고 이것이 부족하면 개화가 지연되고 생산량이 감소된다.

신중하고 세밀한 봄꽃의 계획
이처럼 FIFA 월드컵 결승 진출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봄철의 기온 상승이 개화 시기를 결정한다. 이듬해 봄, 저온요구도가 채워진 나무들마다 총적산온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총적산광량마저 채워지면 꽃눈이 부풀어 오르고 꽃망울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가로수 하나하나가 이처럼 신중하고도 세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 어찌 생명의 경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근자에 기후 변화로 인해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저온요구도를 채우지 못하거나, 갑작스러운 봄철 고온으로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는 등의 생태계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날씨의 장단에 맞추느라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며 영문 모를 고초를 겪었을 것인가. 저들은 지구상의 어떤 종족처럼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며 스스로와 이웃의 대멸종 위기를 초래한 적도 없다.

벗이여, 혹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싶거든 잠잠히 꽃을 피우고 서 있는 저 나무들을 보소서.

성석제 소설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