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총성... 아이들의 죽음만은 대놓고 찍을 수 없었다"

이선필 2026. 4. 2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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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 이 사람 - 영화 '내 이름은'①] 정지영 감독 "보리밭 탈주 장면, 모두 제주 연극배우들"

영화의 모든 장면은 협업의 결과물입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감독의 얘기를 듣고, 그 장면 뒤 숨은 주인공을 만나봅니다. <기자말>

[이선필 기자]

 영화 <내 이름은>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
ⓒ 아우라픽쳐스
영화 <내 이름은>의 연출 제안을 받았던 2021년 12월, 당시 일흔 중반이던 정지영 감독은 고민 끝에 이를 고사했다. 제주 4·3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보고 자신이 과거 연출한 영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남부군>(1990)과 <남영동1985>(2012)로 이미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뤘기에 비슷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는 점, 그리고 "소재 때문에 투자받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는 점이 이유였다.

그 직후 각색 과정을 거친 새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야기의 원안자이자 영화 제작자인 렛츠필름 김순호 대표는 새로운 작가와 함께 두 모자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했던 정 감독은 김 대표의 거듭된 제안을 수락했고, 2년여간 각색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2025년 4월 3일, 제77주년 4·3 추념식에 맞춰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지난 15일 개봉했다. 약 일주일 만에 관객 수는 10만 8905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이다. 흥행 속도가 빠르진 않아도 관람객들 사이에선 소재 자체의 비장함보다 극적 재미와 배우들 연기를 호평하는 분위기다. CGV가 제공하는 실 관객 기반 관람 포인트 데이터에서도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적 몰입감이 다른 요소보다 강점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로서, 그리고 영화를 만든 이로서 각각 인상적이었던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정지영 감독을 만났다.

[기자의 장면] 보리밭 탈주신... 비극의 전시를 비껴가다
 영화 <내 이름은>의 한 장면.
ⓒ 아우라픽쳐스
영화는 국가 폭력의 문제를 학교 폭력과 겹쳐 보여준다. 본명을 숨기고 살아온 엄마 정순(염혜란)과 자기 이름을 싫어하던 아들 영옥(신우빈)의 관계를 통해서다. 과거의 일로 정순은 기억 일부를 잊은 채 살아왔다. 영옥은 교내 폭력 문제를 방관했다.

또래 엄마보다 다소 늙어 보이는 정순은 일종의 공황장애가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종종 혼절한다. 1949년 봄의 기억 때문이다. <내 이름은>의 중후반부, 그 원인이 묘사된다. 우익 청년집단의 소탕 작전으로 트럭에 실려 가던 마을 사람들이 잠깐의 빈틈에 보리밭으로 탈주하는 장면이다. 잠깐의 희망은 무분별한 총성 속에 곧 절망으로 바뀌고, 부모의 손을 잡고 뛰던 어린 정순은 보리밭을 뛰던 이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걸 목격하고 만다. 정순의 키만큼 자라 있던 보리밭은 어느새 사람들의 피로 물든다.

"그 장면에 나온 사람들이 전부 제주에 사는 연극배우들이다. 일반 보조 출연자분들이면 엄청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분들은 딱 알았다. (자신들이 실려 가는) 트럭에서는 이런 표정을 하고, 보리밭에선 이렇게 해보자고 얘기를 나누더라. 사실 그 보리밭을 찾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키도 커야 했고, 규모도 있어야 했거든. 시나리오엔 아름다운 유채밭에서 꽃이 휘날리는 틈에 피가 튀는 장면으로 설정했었다. 그게 더 처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당 장면을 촬영한 곳은 제주공항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인 중산간 지역이다. 메밀밭과 보리밭, 유채꽃밭이 함께 있는 사유지를 수소문해 촬영했다고 한다. 정 감독은 "유채꽃이 키가 작은 것도 있지만, 1950년대에 한국에 들어왔기에 고증으로도 맞지 않았다"며 "안타깝지만 보리밭으로 설정을 바꾸니 충분히 의도한 장면이 나올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 탈주와 학살 장면에서 정 감독은 "찍을 땐 참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객 중에선 되게 절제했다는 반응도 있더라"고 전했다. 특히 아이들이 사망하는 순간은 비록 역사적 사실이어도, "도저히 대놓고 못 찍겠더라"고 그는 고백했다. 영화를 준비하며 정 감독이 참고한 자료는 < 4·3은 말한다 > (제민일보 취재단, 총 3권), < 4·3 그 진실을 찾아서 >(양조훈 저)를 비롯, 여러 증언집과 공식 보고서 등이다.

"국민학교에 몰아넣고 죽인 일도 있고 여러 사례가 있잖나. 근데 시나리오 쓸 땐 그런 자료들이 막 섞여 들어오기에 보지 않으려 했다. 영화 속 그 장면은 결국 어떤 게 영화적으로 효과적일까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다. 내가 <남영동1985>를 찍을 땐 절제를 안 했거든. 그땐 관객들도 똑같이 아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흥행에 실패했잖나. 중간에 나간 관객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걸 교훈 삼아서 이번엔 충분히 촬영은 하되 절제하자고 생각했지."

[감독의 장면] 정순과 영옥의 포옹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다
 영화 <내 이름은>의 한 장면.
ⓒ 아우라픽쳐스
정 감독은 영화 후반부 정순과 영옥이 포옹하는 장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영옥에게 보리밭에 가자고 부탁했던 정순은 또 한 차례 혼절을 겪는다. 영옥은 친구들과 패싸움에 휘말려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렇게 복잡해진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날이 밝자마자 엄마의 방으로 달려간다. 품으로 파고든 아들을 정순은 잠결에 쓰다듬다가 이내 꼭 껴안는다.

"가장 고민했던 장면이다. 시나리오에서도 제대로 정하질 못했고, 콘티 때도 못 잡았거든. 두 사람이 각자 큰 정신적 회오리를 겪고 나서 만나게 해야 하는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 통 모르겠더라. 정순이 자기의 기억을 찾았다고 직접 말할 수도 없고, 영옥도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아픔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스태프들과 이런저런 얘길 하다 나온 결과물이다.

그냥 한번 가서 안아보자 했지. 잠에서 덜 깬 엄마는 마치 옛날 자신 때문에 죽은 친구가 왔나 싶어 안아보니 아들이야. 근데 머리에 붕대를 했네? 놀라면서도 '아, 얘가 나와 함께 못 간 아픈 이유가 있구나' 싶어 그냥 꼭 안는 거지. 배우들에게도 말하니 딱 알아듣더라. 서로 말없이 아픔과 마음을 교환하는 그 장면을 찍고 나서 성공했다 싶었다."

이 대목에서 정 감독은 촬영 때 가장 주의했던 게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단순히 나누지 않는 일"이라 강조했다.

"정순이 피해자이기만 했다면 그런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가해자기도 하니까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산 것이지. 냉정하게 보면 그 당시 정말 빨갱이들은 죽여야 한다 생각했던 사람이 절대다수일까. 지휘자들이 문제인 것이지. 누군가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유년기에 4·3의 아픔을 겪은 정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내면이 망가진 남편, 그리고 큰딸은 5·18 민주화항쟁 당시 또 다른 폭력을 겪고 부모와 의절하게 되기 때문. 정 감독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몸소 겪고도 떳떳하게 살아온 우리들의 어머니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염혜란, 그가 딱이었다... 신우빈은 대성할 배우"
 영화 <내 이름은>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
ⓒ 아우라픽쳐스
정 감독은 영화의 두 축이 된 염혜란 배우와 신우빈 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한 사연도 전했다. 염혜란은 정 감독의 전작 <소년들>(2023)에서 짧게나마 호흡을 맞췄고, 신우빈은 오디션으로 발굴한 경우였다. 최근 2년 사이 염혜란은 주연급으로 부상하며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일찌감치 능력을 알아봤다"며 정 감독이 말을 이었다.

"염혜란 배우는 연기를 현실감 있게 하는데 감칠맛도 있다. 내가 물어보진 않았지만, 캐릭터의 틀을 크게 준비해서 현장과 주변 환경에 자길 맞춰가는 연기를 하더라. <소년들> 때 이미 점찍어뒀지(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 염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거든. <폭싹 속았수다>(2025)는 그 뒤에 출연하신 거다. 정순이 좀 무심하고 초연한 면이 있는데 정감도 있거든. 그가 딱이었다.

출연을 제안한 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해요?'라고 묻길래 '아니 선수가 그걸 나한테 왜 물어요?'라고 답했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게 끝났다. 촬영 현장에서 내 디렉팅이 거의 필요 없었다는 얘기다.

신우빈 그 친구는 대성할 배우라는 생각이다. 영화 경험은 없었지만, 고등학생 때 연극을 많이 했더라. 처음엔 영옥의 친구이자 모범생인 민수를 시키려 했다. 근데 우빈의 얼굴이 예쁘잖나. 주변에 휘둘리고 좀 모자라 보이는 영옥을 더 잘할 것 같더라. 우빈 배우라면 관객분들이 동정하면서도 외면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습시켜 보니 잘하더라. 그래서 하라고 했지."

중저예산 영화 투자 어려운 현실... "매뉴얼 바뀌어야"

알려진 대로 <내 이름은>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초반 제작비를 마련하며 어렵게 완성된 작품이다. 제작사는 2024년 1월경 시민사회 리더 32명의 발기인, 659명의 시민을 중심으로 한 제작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이후 총 9778명이 펀딩에 참여해 3억 8000만 원이 모였다. 영화에 투입된 순 제작비는 약 30억 원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정 감독의 전작들 모두 중저예산에 해당한다. '론스타 게이트'를 다룬 <블랙머니>가 제작비 70억 원대로 비교적 큰 규모였고, 다른 작품들 대부분이 10억 원 미만의 예산이었다.

"대기업 투자사들의 매뉴얼이란 게 있잖나. 첫 번째는 배우가 누구냐, 두 번째는 감독이 누구냐, 그리고 시나리오가 재밌냐인데 거꾸로 가야 하거든. 시나리오가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이 감독, 그리고 배우를 봐야 한다는 거다. 이미 우리가 경험했잖나. 영화가 재미없으니 관객이 들지 않는 현실 말이다.

대작 중심의 투자 시스템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중규모도, 소규모의 작품도 골고루 나와야지. 관객 입장에선 그렇게 다양한 작품들이 나와야 더 극장에 오려고 하지 않을까. 정부에서도 추경으로 지원을 해준다지만, 투자사들이 전부 투자를 꺼리는 마당이지 않나. 이럴 때 그런 과거 매뉴얼을 빨리 버리고 수정해야 한다."

인터뷰 중 정지영 감독은 "영화가 아프지만 재밌지 않았나"고 묻기도 했다. "이 영화가 가진 숙명 같다"며 정 감독은 "예산이 좀 더 있었다면, 제주의 바람을 더 잘 담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썼을 것"이라 덧붙였다.

* '그 장면, 이 사람 - 영화 내 이름은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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