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까닭,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안지훈 기자]
연극 <오펀스>는 고아들의 이야기다.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이 고아로 자라 갱스터 간부의 자리에 오른 중년의 '해롤드'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 트릿은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의 소유자로, 좀도둑질을 해가며 동생 필립을 부양한다. 필립은 형의 강압적인 보호 아래 성장하지만, 마음은 유년 시절에 멈춰 세상과 단절됐다. 이런 형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해롤드가 나타나고, 해롤드는 형제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격려'를 전한다.
"누군가 힘내라면서 어깨를 주물러 준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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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오펀스> 공연 사진 |
| ⓒ (주)레드앤블루 |
지난 8일 관람한 <오펀스>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트릿과 필립 형제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온 고아 형제이며, 해롤드 역시 마찬가지로 고아원 출신이다. 막내 필립이 떠난 엄마의 코트에 집착하고, 형의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날 때마다 엄마의 옷장에 숨는 모습에서 결핍과 그리움이 엿보인다. 형 트릿은 혼자 남는 것을 두려워한 탓에 동생 필립을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과할 정도로 동생을 돌보는 모습에서 스스로 모성을 행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모성의 결핍을 해소하려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트릿과 필립의 결핍은 상대적으로 친절하게 묘사되지만, 해롤드의 결핍은 베일에 숨어있다. 하지만 형제만큼이나 해롤드도 외로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인물일 것이다. 일례로 트릿이 해롤드의 전화번호부를 훔쳐 해롤드를 납치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는데, 정작 그들은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해롤드는 그만큼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었고, 주변에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세 인물을 가족이라는 일차적인 안전망에서 탈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때 사회가 새로운 안전망으로 기능해야 하지만, 세 인물에게 사회는 안전망보다는 험난한 삶의 현장으로 다가왔다. 이 때문에 해롤드는 살아남기 위해 갱스터의 일원이 되었고, 트릿은 외부를 향해 폭력적인 모습을 계속 드러내야 했으며, 필립은 자꾸 안으로 숨어들었다. 연극의 배경이 20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점은, 이들이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해롤드는 형제에게 사회가 응당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해 준다. 격려와 위로를 건네며 안식처가 되어준다. 트릿에게는 새로운 임무를 주며 사회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게 해주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탓에 집밖에 나서지 못하는 필립에게는 바깥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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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오펀스> 공연 사진 |
| ⓒ (주)레드앤블루 |
연극 <해롤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위로와 격려다. 해롤드에게서 트릿과 필립에게로 이어지는, 세대 간의 위로가 작품 속에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오펀스>에는 성별을 넘어선 위로까지 담겨있는데, 한국에서만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고 있다.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초연된 이후 전설적인 배우 알 파치노 등도 출연한 바 있으나, 여성 배우가 출연한 건 한국 공연이 처음이다.
남성 배우 박지일·이석준(해롤드 역), 최석진·오승훈(트릿 역), 김시유·최정우(필립 역)에 더해 우현주·양소민(해롤드 역), 정인지·문근영(트릿 역), 김주연·김단이(필립 역) 등의 여성 배우가 함께 출연한다. 여성 배우들로만 출연진이 구성된 회차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크로스' 공연 회차도 마련되었다.
여성 배우들로 출연진이 구성된 회차에서도 동생 필립은 트릿을 "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필립과 트릿은 엄연한 여성이다. 사실은 "언니"라고 불러야 함에도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건 엄혹한 세상에서 살아내기 위해 남성성을 지녀야 했던 이들의 처지를 반영한다. 호칭이 주는 혼란은 연극 말미에 해롤드가 트릿을 "딸"이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말끔히 정리된다.
김태형 연출가는 지난 3월 19일 진행된 프레스콜에서 "캐릭터를 여성으로 설정하니 이들이 겪은 외부의 폭력이 남성 캐릭터일 때보다 훨씬 위압감 있게 느껴졌다"라며 젠더프리 캐스팅의 효과를 설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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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오펀스> 공연 사진 |
| ⓒ (주)레드앤블루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778c7e88f64d4d2)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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