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가 지지하는 사장님의 출마, 그 이후 벌어진 일
[김종성 기자]
스물여섯 살 된 김대중은 한국전쟁 때 집단학살 피해자가 될 뻔했다. 그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과의 대담록인 <김대중 회고록>에서 "우리 집은 장인, 나, 동생까지 3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어요"라며 그때의 악몽을 떠올렸다.
전남에서 두세 번째 가는 대형 인쇄소 사업가인 장인은 우파로 분류돼 처형장으로 끌려갔다가 총소리에 기절해 쓰러졌다. 일일이 확인 사살을 하던 인민군은 멀쩡히 누워 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욕설을 하면서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인민군은 자리를 옮겼고, 총알은 장인의 귀 옆에 꽂혔다.
김대중과 동생 김대의(해군 방첩대 문관)도 우파로 분류돼 체포됐다. 이들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에 총살을 기다리다가 대기 순번이 늦어 목숨을 구했다. 처형 도중에 인민군이 사라진 뒤 목포형무소로 복귀한 두 형제는 분위기가 바뀐 틈을 타서 옥문을 부수고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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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
| ⓒ 연합뉴스 |
"나는 그 전부터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청년이 죽었습니까? 이 사람들을 위한 국고와 군수품을 횡령하고 빼돌려서 아까운 우리의 청년들이 길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그랬어요.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거창양민학살 사건에서도 아무런 잘못 없는 우리 국민이 공비로 몰려서 비참하게 학살당했어요. 아무리 전쟁통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법도 없고 상식도 없는 그야말로 야만적인 시대였습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3월 15일 편성된 청년방위대의 후신이다. 국군과 별도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는 이승만의 사병부대였다. <역사학연구> 2021년 제82집에 실린 유상수 순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사적 통치기반 형성과 변화'는 "반대세력의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신의 대표적인 통치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평한다.
그렇게 조직된 국민방위군의 병사들은 간부들의 보급품 횡령 때문에 1951년 상반기에 일대 수난을 겪었다. 한미연합군 대 북중연합군의 공방전이 치열한 가운데 1·4 후퇴와 서울 재탈환(3.4) 등이 있었던 이 시기에, 국민방위군 병사 9만여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대통령의 사병부대를 만들어 놓고 추운 겨울에 음식과 옷을 제대로 주지 않아 이런 비극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거창양민학살도 이 시기의 사건이다.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을 일망타진한다는 빌미로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719명을 학살하고 가옥과 재산을 파괴했다. 이 만행이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자행됐다.
이 두 사건에 분노하던 김대중의 가슴에 결정적으로 불을 지피는 사건이 2년 뒤 일어났다. 전쟁 중인 그해에 이승만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장기집권을 위한 불법 개헌에 착수한 일이 그것이다. 위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내가 정치에 투신하기로 한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보고 이 나라의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정치를 이렇게 둘 수 없다고 결심한 김대중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에 제3대 총선에 출마했다. 서른 살이 된 그는 전남 제2선거구(목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무소속이지만 당선 가능성은 높았다.
그는 61세 때인 1985년에 쓴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나는 당시 조선업과 해운업을 하는 한편, 고향에 있는 목포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제법 많은 재산을 모았다"라며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전에서는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동조합이 나를 지지해 주었다"고 밝혔다.
부유한 사업가를 지역 노조가 지지해 준 이유에 관해 "내가 노동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기업가로서의 실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자신 있게 단언했다. "선거를 좌우하는 노동조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조의 영향력이 막강했기에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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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3월 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 응하며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미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 ⓒ 남소연 |
김대중이 서른 살 때인 1954년 당시의 가장 강력한 노동단체는 대한노총(한국노총)이다. 미군정이 전평을 견제할 목적으로 후원한 대한노총은 한국전쟁 중에 자유당의 기간조직이 됐다. 김대중에게 호감을 느낀 노조 활동가들은 이쪽 사람들이다.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자신을 도운 쪽이 "자유당의 기간단체"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노조의 지지는 그가 고배를 마시는 원인이 됐다. 그는 자유당 기간조직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자유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싫어 정치를 시작한 그가 자유당에 들어갈 리는 없었다. 이것이 자유당의 탄압을 불렀다.
자유당은 자당 기간단체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김대중의 '실용 노선'을 좌시하지 않았다.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자유당이 자당의 의석 확보를 위해 나에게 관권을 동원하여 탄압"했다고 말한다. 자유당은 김대중에게 매료된 노조원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경찰이 노조위원장 이하 간부들을 모두 잡아갔어요"라고 말한다.
대한노총 지부의 지지를 받은 일은 그가 한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러브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민국당 후보가 대한노총의 지지를 받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유력한 두 정당과 거리를 둔 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총투표수가 3만 3965표인 목포 선거구에서 김대중은 민주국민당 정중섭(25.64%), 자유당 유정두(17.09%), 무소속 안길호(12.91%), 무소속 홍익선(11.29%) 이어 9.98%(3392표)로 5등을 기록했다. 6등부터 10등까지는 대한노총 신유돈(9.10%), 대한노총 임기봉(7.27%), 무소속 박희정(5.04%), 무소속 이숙노(1.62%), 민주국민당 김현규(0표)였다.
전남 선거구 30곳 중에서 대한노총 간판으로 후보가 출마한 곳은 목포뿐이다. 이곳에서는 노총 후보가 둘이나 나왔다. 여기다가 김대중까지 노총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당 지도부가 유정두에게 가리라고 기대했던 표를 김대중과 노총 후보 둘이 잠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함경남도 출신의 교육자인 민국당 정중섭(1898~1978)이 국회에 진출했다. 정중섭은 1958년 총선에서도 목포에서 당선됐다.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민국당은 공천을 내정해놓고도 나한테 교섭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민국당 지원을 받았다면 그와 정중섭의 처지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훌륭한 청년 기업가를 만났다며 그를 응원해준 노총 조직원들의 도움이 그에게는 패인으로 작용했다. "(노총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도와주지 못했어요"라고 그는 평했다.
김대중은 국민방위군 청년들의 대규모 희생, 거창 주민들의 학살 피해에 더해 장기집권을 향한 이승만의 폭정을 지켜볼 수 없어 나이 서른에 정치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대한노총 지부의 지지라는 호재를 만났다가 그것이 악재로 돌변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 경험은 김대중이 정치에 대한 의지를 더 불태우게 만드는 촉매제가 됐다. 그는 총선 이듬해인 1955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 "제대로 정치를 해보겠다고 작심하고 올라왔어요"라고 회고록은 말한다. 자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세력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작심은 그를 결기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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