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잡역부로 일하는 집, 8살 소년이 마주한 진실

김상목 2026. 4. 2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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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8살 소년 '브루노'는 군에서 승진한 아버지가 영전하면서 베를린에서 폴란드 부임지로 가족과 이사하게 된다.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땅에 도착한 소년이지만, 중세 기사의 모험 이야길 좋아하는지라 집 주변으로 탐험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부모님은 숲속으로 연결된 뒤뜰에는 출입을 금지한다. 하지만 또래 친구라곤 없는 브루노는 우연히 자신의 방 창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농장'을 발견한다. 그곳엔 아이들도 제법 많아 보인다.

어느 날 뒤뜰을 빠져나와 농장으로 향한 소년은 그곳이 고압 전기까지 흐르는 철조망에 둘러싸인 걸 알게 된다. 그 너머엔 자기와 동갑 소년 '슈무엘'이 있다. 외롭던 소년은 친구를 사귈 기쁨에 젖지만, 머리를 빡빡 민 데다 이상한 잠옷을 입은 친구는 뭔가 비밀을 품은 듯하다. 그래도 매일 몰래 슈무엘과 만나는 게 삭막한 이곳 유일한 낙이다. 친구가 아빠를 잃어버린 걸 알게 된 브루노는 철조망을 넘어 돕기로 약속한다.

아이들의 눈으로 본 기괴한 어른들의 세상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스틸
ⓒ 팝엔터테인먼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번영하는 대도시.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에서 소년들은 즐겁게 뛰어논다. 만면에 웃음과 긍지가 가득한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단정한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무엇 하나 모자랄 게 없는 이상적인 풍경이다. 부강한 나라의 근면한 시민들의 모습은 흠 잡을 데 없다. 질서와 청결을 선호하는 이라면 이상향처럼 여길 만하다. 거리를 쭉 훓던 카메라가 뒷골목 구석으로 향한다. 일단의 사람들이 군인들의 재촉에 쫓겨 트럭에 올라탄다. 그들의 집은 소개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주인공은 그저 정다운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을 따름이다. 아빠가 군인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이사한 새 집은 뭔가 삭막하다. 예전 집보다 훨씬 대저택이긴 해도 여긴 친구도 학교도 마을도 찾을 수 없다. 창문 저편에서 묘한 행색의 사람들이 일하는 농장만 흐릿하게 확인될 뿐이다. 소년은 어떻게든 여길 떠나고 싶지만, 12살 누나 '그레텔'은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은 지하실에 팽개치고 군복과 정치 포스터로 자신의 방을 도배한다. 하켄크로이츠가 선명하다. 나치독일의 시대인 것.

하지만 8살 소년은 아직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 저택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노인도 농장 사람들처럼 잠옷 같은 낡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 채소를 나르거나 감자를 깎던 노인은 뒤뜰에서 그네를 타다 넘어진 주인공의 상처를 치료해준다. 괜찮을 거란 그의 말에 의사도 아닌데 뭘 아느냐고 핀잔을 주던 브루노는 그가 의사였다고 밝히자 당황한다. 왜 의사가 여기서 허드렛일이나 한단 말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런 걸까? 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부모님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는다.

드디어 친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가정교사가 가르치는 딱딱한 역사 수업에 싫증이 나던 참에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은 유일한 즐거움. 그런데 친구는 비쩍 마른 데다 늘 두려움에 떤다. 식사에 초대하거나 경계를 넘어와 같이 공놀이를 하자 해도 그럴 수 없단다. 소년은 대관절 영문을 알 수 없다. 나중에 농장이 수용소란 걸 알지만, 아빠가 사람들과 함께 관람하는 영화를 보니 딱히 나쁜 곳은 아닌 듯하다. 필름에는 열심히 일하고 나서 카페에서 여가를 보내고 문화생활을 누리는 이들의 밝은 표정이 가득하다.

어른들의 위선과 흉포를 꿰뚫는 아이들의 순수함
 ㅡ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스틸
ⓒ 팝엔터테인먼트
친구도 생겼고 아빠가 좋은 일을 하는 걸 확인했으니 그럭저럭 여기도 지낼 만한 곳이다. 하지만 점차 적응해가는 소년과 달리 엄마는 어느 날부터 어떻게든 여길 떠나려 하며 아빠와 다툼이 잦아진다. 손자에게 늘 자상하던 할머니는 아빠의 초대에도 한사코 방문을 거부한다. 할아버지는 애써 얼버무리지만, 가족의 식사 자리엔 냉랭함만 감돈다. 아빠의 잘생긴 부하 장교와 어울리던 누나도 조금씩 이곳에 질색한다. 위신 때문에 가족과 떨어지기 싫어하던 아빠도 한발 양보해 친척 집으로 다른 식구들을 이사 보내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여길 뜨고 싶어한 아들이 막상 기회가 오자 싫은 티가 역력하다. 친구를 잃기 싫은 것. 엄마는 어리둥절한다. 남편과 가정교사의 나치즘 주입식 교육이 자식을 망치는 것만 같다. 누구도 브루노의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8살 남자애의 은밀한 모험을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이제 소년은 심장이 쿵쿵 뛰는 일생일대 모험에 나설 참이다. 금단의 벽을 넘어 소중한 친구의 어려움을 힘을 합쳐 돕는 일이다. 칭찬을 받아 마땅한 선행이자 우정의 발로다. 모든 일은 그렇게 벌어진다.

탐험의 결말은 18년 만에 정식 개봉하는 영화를 목격하면 알 수 있다. 진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어른들,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의심 없이 추종하는 누나와 달리 골치 아픈 역사나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일은 알 수 없는 소년의 심리는 단순하고 간명하다. 친구가 필요할 뿐이고, 아빠나 가정교사, 군인 아저씨들의 무서운 이야기와 달리 유대인 또래 아이는 그저 죽이 맞는 친구다. 뭐가 뭔지 통 알 길이 없다. 아빠는 그들이 나쁜 일을 해서 벌을 받는다고 하지만, 자신을 치료해준 '파벨'이나 유일한 벗 '슈무엘'이나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아빠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국가의 적에 맞서 싸운다고 툭하면 강조한다. 그런데 아빠 부하들은 친구에게 욕하고 구타를 일삼는다. 그들이 오히려 나쁜 사람처럼 보인다. 유대인의 악함을 설파하며 그들만 엄하게 대한다는 설명과 달리 아빠는 점점 가족에게도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아이들은 아빠 눈치만 살피고, 엄마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화목하던 가족은 그들이 사는 휑한 저택처럼 황량하게 변한다. 그럴수록 소년은 더 친구를 찾는다. 친구는 자기와 달리 아빠를 존경한다. 괜히 부럽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또 다른 단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스틸
ⓒ 팝엔터테인먼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나면 누구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실은 10여 년 일찍 나왔으니 선후가 뒤바뀐 셈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두 영화의 얼개는 닮은 꼴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상징과 같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소장을 역임한 무장친위대 중령 루돌프 회스의 삶을 배경 삼았고, 희생자의 참상을 가해자의 위선 가운데 틈새로 투영하는 전개 덕이다. 자연히 두 작품은 비교 대상으로 거론될 운명이다.

매우 유사한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수용소장의 시선으로 본 아우슈비츠를 그린다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8살 소년의 눈높이로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세상을 조망하는 차이를 선보인다. 숨막힐 정도로 건조한 관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비인간화에 도달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아이들의 편견 없는 시선, 어른들이 주입하는 틀에 아직 규격화하지 않은 순수함을 극대화해 기묘한 아이러니를 관객에게 투척하고자 한다.

실제로 루돌프 회스는 영화 속 아빠가 그랬듯 실제로 강제수용소의 철조망과 감시탑 바로 옆 사택에서 가족들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생활했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지내는 저택 한쪽 집무실에선 인간 도살을 위해 어떻게 효율성을 향상할지 끔찍한 회의가 매일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초반에 엄마는 남편이 뭔가 꺼림칙한 업무에 종사한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진급과 출세의 대가가 달콤했던 탓이다.

하인을 부리며 귀족처럼 풍요한 생활을 얻는 대신, <대부> 1편에서 남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족까지 몰살 명령을 내리는 냉혈한임을 깨닫는 순간을 상징하는 명장면, 아내의 눈 앞에서 남편의 심복이 집무실 문을 닫는 찰나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앞으로 다가올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 조금씩 끔찍한 진실을 엿보고, 아직은 양심을 온전히 잃지 않았기에 타인의 고통에서 달아나려 하지만, 그들이 지금껏 누리던 사회적 성공과 부의 대가는 제물로 봉납해야 한다.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비극의 파도는 인신공양을 일삼던 고대 희생제의의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리스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스틸
ⓒ 팝엔터테인먼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룬 영화 중에도 대중적으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올 만큼 독창적 접근법과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한 수작이다. 영화화한 원작의 속편 소설에선 주인공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전쟁 이후 후일담까지 소개해 나치 독일의 만행이 어떤 파괴적 결과, 인간성 상실과 치유 불가능한 상흔을 남겼는지 파헤친다. 잔혹동화에서 출발해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역사, 기계적 합리주의가 윤리를 상실할 때 어떤 참상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온전히 보여주는 우화로 진화하는 작업이다.

영화의 다른 강점은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의 '내로남불', '강 건너 불구경'의 대중심리다. 타인의 고통은 내 알 바 아니다.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니 다 맞는 말일 게다. 의심스러워도 함부로 속마음 드러내면 위태로우니 침묵하자. 그렇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금방 알 수 있을 반인륜 범죄를 나만 잘살면 된다며 눈감아 버렸다. 의심을 제기하면 '반국가', '비국민'으로 몰아 모진 탄압을 일삼았다. 그걸 본 이들은 더욱 체제의 눈에 들고자 열광적으로 충성심을 증명하려 한다. 할아버지나 아빠의 부하 코틀러 중위가 그 전형이다.

2026년 한참 늦게 극장을 찾는 영화를 둘러싼 풍경은 모순 그 자체다. 작품 속 피해자의 후예들은 선조의 학살자를 닮으려 필사적인 것처럼만 보인다. 그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로 역사의 가해자를 옹호하는 아이러니가 조성된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역사의 선후와 교훈은 즉자적 감정에 휘둘리면 오히려 더 미궁에 빠질 뿐이다. 결국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대가로 치르는 것조차 원죄를 해소할 수 없듯이, 가해자가 된 피해자란 '괴물'을 창조하는 데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 허상의 경계와 배제를 어찌 극복할 것인지 숙고할 때다.

<작품정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영국|전쟁, 드라마
2026.04.23. 개봉|94분|12세 관람가
감독 마크 허만
각본 존 보인, 마크 허만
출연 에이사 버터필드, 베라 파미가, 데이빗 듈리스 외
원작 존 보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수입/배급 ㈜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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