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분노는 왜 '휴민트'에서 안 통했나
[고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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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팬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떠돈다. 모든 감독은 한 가지 이야기만 한다. 배우와 장르, 연출 문법은 바뀔 수 있더라도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라는 뜻이다. 이창동의 구원, 봉준호의 계급의식, 박찬욱의 속죄, 홍상수의 허위의식처럼 한국 영화로만 시야를 좁혀봐도 수긍이 가는 분석이다. 같은 분석 틀을 류 감독에게 적용한다면 도출되는 결괏값은 분노가 아닐까.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청춘의 희망을 짓밟는 사회에 대한 투박한 울분이었다. 이후 지방 토호의 결탁으로 무너지는 소시민의 삶(<짝패)>, 검찰과 경찰의 알력 다툼과 공권력의 부패(<부당거래>), 사회적 규범을 농락하는 재벌가의 갑질(<베테랑>). 보는 사람이 다 아픈 성룡식 액션의 레이어가 덧댔지만, 데뷔부터 20년 넘게 뿜어온 분노야말로 '류승완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이었다.
아쉽게도 <휴민트>에서는 감독이 의도하는 분노의 행로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남과 북의 정예 요원이 등장하지만 2026년이니만큼 분단 조국이란 비극을 잉태한 체제 대결로는 물론 보이지 않고, 인명을 경시하는 인신매매에 대한 분노라고 보기에도 어딘가 과녁이 흐릿하다. 메인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황치성(박해준)의 악행이 러시아 갱단과의 공조로 분산됐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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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휴민트>의 정서적 테마를 공유하는 영화들의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주먹이 운다>의 태식(최민식)은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였지만 도박과 사업 실패로 돈도 명예도 가족도 잃고 길거리에서 매 맞으며 돈을 번다. 시시한 동네건달이던 상환(류승범)은 패싸움에 휘말려 사람을 죽이고 소년원에 수감된다. 잃을 것 없이 각자의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던 이들은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신인왕전 타이틀을 두고 링 위에서 격돌한다.
<베테랑2>에서 도철(황정민)은 악의없이 행한 일들의 후폭풍을 맞는다. 1편에서 친구들과 싸웠다는 아들에게 서도철은 '나가서 맞고 오느니 차라리 깽값을 물어주라'고 말하고, 아들은 학폭위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됐다. 도철이 조태오 잡는 걸 보고 경찰이 됐다는 후배 박선우는 사적제재를 일삼는 해치가 됐고 도철의 아들을 납치하기까지 한다. 도철은 죽이고 싶은 선우에게 심폐소생술을 해 살려내고는 아들에게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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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취재한 내용보다 작품에 더 많이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이창동 감독님과 홍상수 감독님이 현실을 찍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잖아요? 그 대한민국이 서로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이죠. 저도 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자꾸 거리로 나가보려고 하고, 지하철이라도 더 타보려고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가급적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소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식을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땅에 발을 디디고 설 때 비로소 그게 내 것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현장의 감각을 안고 있어야 그 영화에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담길 게 아니겠어요? 감독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태도 말고도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는 원칙이랄까, 그런 걸 잃는 순간 제 영화도 가짜가 될 것 같은 공포가 제게 있어요.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중 "장르의 쾌감과 삶의 비감 사이, 걸음을 멈추지 않는 장남의 영화 : 류승완")
대중과 평단의 차가운 평가 속에 <군함도>는 말 그대로 흑역사로 남았다. 성실하게 신작을 내던 류 감독은 무려 4년을 쉬며 <모가디슈>를 내놨다. 참혹한 현장에서 탈출한다는 플롯은 <군함도>와 같았지만 누가 먼저 UN을 가입하느냐로 기싸움하던 남한과 북한 대사관의 인물들이 협력하여 소말리아 내전 지역을 빠져나가는 이야기는 코로나로 침체된 극장 상황을 극복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고 각종 영화제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황정민이 돌아오고 이준호, 천우희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베테랑3>의 촬영을 연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코로나 못지않은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영화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 정작 극장에서 외면받은 게 어쩌면 큰 타격이었을지 모른다. <휴민트>에서도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모습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정중하게 사과했던 류 감독이기에, 강한 놈이 살아남는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놈이 강하다는 걸 증명해 왔기에.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원칙을 잊지 않았다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지선다를 벗어나 다시 한번 한국 영화의 베테랑으로 돌아올 거라는 다시 한번 믿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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